[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말씀하신 독립 운동을 크게 해보자는 약속의 결과물이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인 것이지요.

“임시정부가 독립선언의 유일한 결과는 아니지만 3·1독립선언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분명합니다.”

-선생님께서도 3·1운동 직후에 미국을 떠나 중국으로 가셨습니다. 바야흐로 임시정부 활동에 뛰어드신 것이죠. 그리고 내무총장, 국무총리 서리 역할을 맡으셔서 출범 초기 임시정부를 꾸려가는데 핵심 역할을 하셨습니다. 훗날 역사가들의 분석을 보면 임시정부 초기에 국무위원급(지금의 장관격) 요인 중에 상해에 있었던 분은 선생님뿐이셨다고 합니다. 초기 임시정부의 얼개를 짜셨는데, 임시정부 운영의 원칙이랄까요 목표랄까요, 그때 구상하신 임시정부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우선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국무총리 서리나 내무총장을 맡았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나 안창호 일인이 임시정부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보다는 임시정부가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다. 제가 그런 직함을 맡기는 했지만 나는 사람들의 머리가 되려고 간 게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러 간 것뿐입니다. 저뿐 아니라 임시정부에 참여한 동지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가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이 정부를 영광스런 정부로 만들어야겠다고 말입니다.

임시정부는 당당한 기관이었습니다. 우리의 권능에 대해서는 위로는 하늘을, 아래로는 사람을 향해 아무런 부끄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임시정부는 누군가의 야심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오직 인도주의와 정도에 입각해 성립된 조직이었기 때문입니다. 내 물건을 내가 찾듯 우리 스스로 우리의 주권을 찾자는 것이었고, 또 한반도에 모범적 공화국을 세워 2000만 국민이 복락을 누리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한 활동이었습니다. 대한의 새로운 공화국이 건설되는 날이 동양 평화가 견고해지는 날이고 동양 평화가 있어야 세계 평화가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당당한 목표로 시작을 했으니 더 굳은 뜻으로 합리적으로 임시정부를 운영해가며 세상이 감히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방법론으로는 외교와 군사상 준비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외교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기존부터 하고 있었는데 임시정부가 성립된 뒤로는 그 길이 더욱 크게 열렸습니다. 우리는 외교를 하더라도 광명정대하게 하고 결코 일본이 하는 것처럼 권모술수를 부리는 외교는 하지 않겠다고 했지요. 기미년 독립선언은 평화적인 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이 평화적으로 안 되면 반드시 군사적으로 해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임시정부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망명지에 세워진 정부가 일본의 강한 무력을 이길 수 있느냐고 비웃는 자들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일본의 무력이 강하다 한들 인도주의와 정의의 피를 언제까지 이겨낼 수 있었겠습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은 단합이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독립을 주든 안 주든 상관없이 우리의 목표는 우리 스스로 독립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당시 정부는 상하이에 있었으나 정부의 주권자들이 다 상하이에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민의를 모으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합하면 살고 나뉘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한번 결심한 것을 변치 말고 세계가 모두 우리를 배척하더라도, 또 군사 행위가 실패하더라도, 또다시 일어나 우리의 기능을 찾자고 결심한 것입니다.”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출범 초기 임시정부의 구성을 보면 이름난 독립운동가들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신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그리고 임시의정원장은 이동녕 선생이셨지요. 임시정부 내부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말하자면 신(新)도 있고 구(舊)도 있고 반신반구(半新半舊)도 있어서 조화롭다고 할까요. 노(老)도 있고 소(少)도 있는가 하면 또 중노(中老)도 있고, 문(文)도 있고 무(武)도 있었지요. 눈을 부릅뜬 범 같은 이도 있고, 예수의 사도 같이 온후한 이도 있었습니다. 각지에 있던 인재가 모였기에 각지의 사정을 다 잘 알았지요. 단언하건대 임시정부가 처음 구성될 당시에는 그 이상의 내각은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지하시다시피 지금의 대한민국은 바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각계의 훌륭한 분들이 모여 임시정부를 이끌어간 것은 참 반가운 일입니다. 하지만 곤란한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평가는 당시부터도 나온 것으로 압니다. 임시정부 내에서도 파벌 갈등이 있었다던데 맞는 말입니까?

“이렇게 말씀드려도 곧이곧대로 듣지 않을 수 있겠지만 임시정부에 파벌 간 갈등이 있었다는 평가는 거둬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시에 흔히 상하이에는 편당(偏黨)이 있네 결렬(決裂)이 있네 그러니까 망했네 하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설사 상하이 전체가 다 결렬된다고 한들 2000만 인민이 다 결렬될 리야 있겠습니까. 일시적으로 의견의 차이가 있기도 했지만 누가 옳다 누가 그르다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일을 해 나가는 데 의견이 합치되지 않는 경우는 피치 못할 일인데 조금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저놈들도 또 싸우네’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말로 글로 있지도 않은 파당이나 결렬을 있는 것처럼 떠들어서 우리의 적들이 하는 것처럼 악성 프로파간다를 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흐음, 임시정부의 정통성이나 의의를 폄하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도 갈등 요소는 있지 않았겠습니까. 걸출한 지도자들이 모인 조직이니 각자가 그리는 민족의 미래가 조금씩 다르긴 했겠지요. 실제로 선생님께서도 임시정부의 성공을 위해 ‘통일’의 필요성을 누차 강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임시정부의 성공이라기보다는 독립 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나는 제 입으로 통일이란 말을 많이 했습니다. 외교든 군사든 아니 다른 무엇을 하든 통일이 없이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재력이 있다고 한들 통일이 되지 않는다면 결국은 민족이 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각자가 본인이 잘났다고 다 달아나 버리면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그때는 어려운 시절이니 사람들 중에는 ‘통일이 좋긴 한데 우리 민족은 원래 통일하지 못할 민족’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다음편에 계속...)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도산의 답변은 모두 생전 그의 글과 연설에서 발췌하여 문맥에 맞게 다듬은 것이다. 도산은 열정적인 연설가였지만 편지 글과 일기 외에 글은 그다지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만 46세를 맞은 1924년 중국 베이징에서 춘원 이광수에게 구술해 작성한 뒤 ‘동아일보’와 잡지 ‘동광’에 연재한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도산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 ‘독립신문’과 ‘신한민보’ 등에 실린 연설문 또는 연설문 개요, 동지 및 가족들과 주고받은 서한 등을 활용해 살을 붙였다. 도산의 삶의 여정에 관한 내용은 주요한 선생이 정리한 ‘안도산 전서(증보판)’(흥사단출판부, 2015)의 전기 부분과 김삼웅의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현암사, 2013)를 주로 참고했다.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