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미국방문 때 동행했던 김희덕장군(왼쪽에서 두 번째)이 미공군기지 관계자들로부터 영접을 받고 있다.

5.16 직후 최고회의 경호실 핵심요원으로 발탁된 이 대위는 청와대 초대 경호실장을 지낸 박종규 소령과 함께 경호실 창설작업을 주도해나갔다. 이 대위의 직책은 경호실 기동반장이고 박 소령은 경호대장이었다. 이상훈 장군의 회고.

경호실의 기본조직은 여러 나라의 것을 참고로 했지만 주로 백악관 경호시스템을 많이 모방했다. 당시 내가 받은 직책은 기동반장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청와대 경호실 수행과장 정도라고 생각하면 무난할 것이다. 박정희 장군이 행차할 때에는 주로 헌병지프(헌병중위가 선탑)가 선두대열에 있고 그 뒤로 박 장군을 태운 차, 그리고 수행원을 태운 검은 세단 등이 뒤를 따랐다. 이 때 박 장군이 탄 차 양쪽 곁에 지프 2대가 경호를 하게 되는데 내가 하는 일은 바로 이 경호지프에 쌍권총을 차고 타거나 박 장군을 측근에서 경호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행사장에 따라 군복을 입거나 또는 사복으로 갈아 입고 활동했다.

여기에서 ‘쌍권총을 차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물론 당시에는 위압감과 권위의 상징으로 내비쳐졌겠지만 얼핏 보면 서부영화의 총잡이를 연상케 한다. 그만큼 이 대위는 5.16 소용돌이 속에 박정희 장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 대위는 경호실 구성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자 1961년 8월 미국으로 건너가 미육군고등군사반의 1년 과정을 수료한 뒤 1962년 7월 귀국했다. 그리고 그는 또 다시 박정희 장군의 권유에 따라 최고회의 경호실에 근무하게 됐다. 원래는 전남 광주보병학교 교관으로 발령이 났으나 박 장군에게 신고하는 자리에서 “다른 데 가지 말고 당분간 경호실 일을 계속 맡아하게.”라고 하는 바람에 경호실에서 근무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이 대위는 최고회의비서실에 근무하는 전두환 대위와 다시 만나게 됐다.

이때 이 대위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 대위가 비밀리에 조직하고 있는 ‘하나회’에 관한 내용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최성택 대위 등 영남출신 장교들이 주동이 되어 ‘어떤 모임’을 결성한다는 것이었다. 이 대위는 전 대위와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무슨 조직을 결성한다는 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전 대위는 선선히 시인하면서 이 대위에게도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이 대위는 모임 멤버들이 대부분 영남 출신이라는 점에서 우려를 표명하며 “전체의 육사 단결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의견을 전했다. 그러자 전 대위는 “국가든 조직이든 어차피 소수의 엘리트가 움직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부터 엘리트그룹을 형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위는 견해가 다르다며 부정적인 시각을 내비치자 전 대위는 더 이상 가입을 권유하지 않았다.

여기서 ‘지금부터 엘리트그룹을 형성해야 한다’는 말과 ‘국가든 조직이든 어차피 소수 엘리트들이...’라는 대목은 5.16거사가 야심에 찬 청년장교들에게 이런 저런 여러 가지의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생각하게 한다. 이 장군은 ‘하나회’의 태동을 상기하면서 구체적인 움직임은 5.16 직후부터 시작됐다고 밝혔다. ‘하나회’ 구성원 중 처음에는 대구 경북 출신이 많았으나 지역편중이라는 비난여론을 의식, 나중에는 충청 호남 출신들도 가입하게 됐다고 말한다.

원래 ‘하나회’ 결성의 배경은 육군사관학교 생도시절로 한참 거슬러올라간다. 청운의 꿈을 품고 4년제 정규육사에 첫 입교한 육사11기 200명의 생도들은 자연스럽게 지역 출신별로 어울리게 됐다. 대구공고를 졸업한 전두환 생도, 경북고 출신의 노태우 김복동 정호용 생도, 경남고의 최성택 생도, 경북대 사대부고의 백운택 생도, 대구능인고의 권익현 생도 등은 생도시절부터 운동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몰려다녔다.

마찬가지로 서울과 이북 출신 생도들도 그들대로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수석으로 입교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인천상고 출신의 김성진 생도, 경동고의 서우인 생도, 양정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2학년까지 다니다가 입교한 이대호 생도, 진남포고의 김광욱 생도, 개성상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1학년 재학 중 입교한 이동남 생도, 경기고의 김영국 생도, 중동고의 이동희 생도 등이 또 하나의 그룹을 형성했다. 이들은 훗날 ‘청죽회’ 모임으로 발전했다.

생도시절 영남 출신들과 서울 이북 출신들로 형성된 두 그룹은 임관 후 제각기 뿔뿔이 흩어졌지만 ‘하나회’와 ‘청죽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그들 나름대로의 인연을 유지했다. ‘청죽회’는 5.16 직전까지 육사 교수부와 서울 주변의 학군단 그리고 순수 야전군에 포진해 주도권을 잡는듯 했으나 5.16 직후부터는 ‘하나회’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청죽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청죽회’는 5.16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운신의 폭이 좁아지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하나회’는 자연스럽게 ‘청죽회’를 누르고 부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12.12때 신군부에 반대했다는 구실로 육사11기 서우인 대령이 예편했다. 결국 생도시절 학구파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청죽회’ 멤버들은 대부분 12.12 이후 ‘하나회’ 세력에 밀려 예편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회’ 뿌리는 전두화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백운택 생도 등 5인이 결성한 ‘오성회’에서 비롯됐다. 오성회 멤버들은 1955년 임관 후 꾸준히 친목을 도모해오다가 정호용 등이 가세하면서 ‘칠성회’로 변모했다. 몇 년 후에는 권익현과 대구대 재학 중 입교한 박갑용, 그리고 전남 장흥 출신의 노정기가 가세하여 육사11기 ‘10인회’가 되었고 1963년 정식으로 ‘일심회’(하나회)의 출범을 보게 됐다. 이 모임은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 군내의 막강한 사조직으로 탈바꿈해 나가면서 12기 이하 후배 기수들 중에 선두주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 ‘하나회’ 조직에 가입시켰다.

이러한 세확장을 바탕으로 ‘하나회’는 1973년 초 이른바 ‘윤필용 사건’ 때 그 일부가 법적 제대를 받아 군에서 어느 정도 제거되기도 했으나 1979년 10.26사건이 날 때까지 암암리에 성장을 지속하여 제5공화국을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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