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TV 화면 캡처

3선개헌안 통과 시나리오는 이후락 작품

그러나 3개월 뒤인 1969년 9월14일 3선개헌안은 국회에서 변칙통과됨으로써 10월17일 국민투표를 거쳐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육 여사가 그토록 반대했던 3선개헌안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배경을 잠깐 되짚어보자.

3선개헌이 최초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쯤이었다. 아직 박 대통령이 재선임기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다. 이 때 측근에서는 벌여놓은 일을 마무리짓고 이 나라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박 대통령이 계속 집권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3선을 금지하고 있는 현행법을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반면 절대 안된다는 경고의 목소리도 있었다. 박 대통령은 이에 정확한 의지표명은 하지 않았다. 다만 개헌 불가론보다 개헌을 건의하는 측과 가깝게 지냈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의 숨은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3선 개헌문제는 1967년부터 시작된 박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동안 ‘태풍의 눈’이었다. 그러나 1968년 말까지는 표면화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1969년 새해 시작과 함께 치밀하게 계산된 시나리오처럼 불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해 1월7일 윤치영(尹致暎)공화당의장서리가 “단군 이래의 위인인 박정희 대통령을 계속 집권시키기 위한 개헌이 필요하다.”고 선언함으로써 급속도로 진전됐다. 그러자 개헌을 지지하는 정체불명의 정치단체들이 속출했고 신문에 개헌 필요성을 광고로 내는 일이 계속됐다. 박 대통령은 처음에는 “개헌할 의사가 없다.”고 말하더니 나중에는 “개헌을 하더라도 아직은 시기가 아니다.”고 여운을 남겼다. 육 여사가 김 장군을 불러 3선개헌 불가를 설득시켜 보려 했던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7월25일 박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에 대한 최종 결심을 천명했다.

1. 기왕에 거론되고 있는 개헌문제를 통해 나와 이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는다.
2. 개헌안이 국민투표에 통과될 때 그것이 곧 나와 이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임으로 간주한다.
3.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될 때 나와 이 정부는 야당이 주장하듯 국민으로부터 불신임을 받는 것으로 간주하고 나와 이 정부는 즉각 물러난다.
4. 이에 따라 여당은 빠른 시일 안에 개헌안을 발의해줄 것을 바란다.

▲ 사진=KTV 화면 캡처

이 담화는 단순한 개헌발의가 아니었다. 개헌안에다 정권에 대한 신임을 결부시킨 고도의 정치기술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이후 박 대통령은 이후락 청와대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그리고 김성곤(金成坤), 백남억(白南檍)의원 등 공화당 중진들에게 충성경쟁을 유도, 반대파의 기세를 모두 꺾었고 마침내 3선개헌안은 국회에서 통과됐다.

김 장군은 이와 관련 “당시 3선개헌안 통과 시나리오는 이후락 비서실장 작품이었으며 작업은 주로 세종호텔 3층 밀실에서 매우 용의주도하게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3선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의 3선연임을 허용하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결의의 요건을 강화하는 한편, 국회의원의 행정부 장 ·차관의 겸직을 허용하는 것 등이다.

1962년 12월 26일 개정된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연임규정이 ‘1차에 한해서 중임할 수 있다.’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2차까지 연임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상 다시 출마할 수 없었다.

제6대 대통령 임기가 끝나갈 무렵인 1969년 1월6일 공화당의 길재호(吉在號)사무총장은 현행 헌법의 미비점을 보완, 개정하기 위한 문제가 여당 내에서 신중히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는 비공식 발언을 했다. 이어 이튿날인 7일 윤치영 당의장서리가 “필요하다면 대통령의 2차 이상 중임 금지 조항까지 포함해서 개헌문제를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을 사견형식으로 기자회견에서 발표했다. 이유는 북한의 도발위협 속에서 경제건설의 가속화를 위한 정치적 안정의 극대화를 위해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개헌발언에 대하여 신민당은 그 날로 즉각 반대할 것을 발표했고 2월3일 열린 공화당 의원총회에서도 개헌에 대해 찬반 양론이 엇갈렸을 뿐 아니라, 전국적인 여론으로까지 확산됐다. 그러자 2월4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지금은 개헌논의의 시기가 아니다.”라고 시사하고, 개헌논의 중지를 지시하였다.

개헌을 놓고 엎치락 뒤치락하던 중 7월 박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개헌논의를 시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를 통과시키기 위하여 정부여당은 야당인 신민당 의원 3명을 포섭하여 모두 122명의 개헌지지선을 확보하고, 대한반공연맹 대한재향군인회 등 50여 개의 사회단체들을 동원하여 개헌지지성명을 발표하게 하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에 신민당은 3선개헌에 동의한 의원의 의원직을 박탈하기 위하여 9월7일 당을 해산하는 편법을 사용하여 ‘신민회’라는 이름의 국회교섭단체로 등록하였다. 또한 신민당은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열고 개헌반대투쟁에 나섰다. 한편, 전국 대학가에서는 연일 장기집권을 막기 위한 개헌반대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같은 달 14일 일요일 새벽 2시 국회 본회의장에서 점거농성을 하고 있던 신민회 의원들을 피하여 국회 제3별관에 여당계 의원 122명이 모여 기명투표방식으로 찬성 122, 반대 0표로 개헌안을 변칙통과시켰다.

그 후 개헌안은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총유권자의 77.1% 참여에 65.1% 찬성을 얻어 확정됐다.

이로써 박정희는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다시 출마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고, 또 당선됨으로써 1972년 이후 유신체제와 함께 장기집권을 하게 됐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