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현대사의 물줄기를 역류시킨 또 하나의 사건

10.26의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데서 불거져 나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장병들 사이에 ‘유신헌법은 악법이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박 대통령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군지휘관들은 장병들에게 정신교육시간 때마다 ‘유신헌법만이 살 길’이라고 주입해 왔기 때문에 이같은 반발은 자휘관들을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장군은 각 예하부대를 직접 방문해 비록 시대와 정권이 바뀌더라도 군인은 항상 군통수권자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이해시켰다. 군인은 국민과 국가를 지키는 것이 본연의 임무이며 유신헌법 등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들의 몫이라고 설득했다.

□10.26사건 요약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는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가졌다. 연회 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가슴과 머리를 맞았고 곧 국군 서울 지구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송 중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이날 저녁 7시 41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김재규가 권총을 꺼내 차지철의 오른손목을 맞혔고 이어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박정희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심수봉과 신재순이 총에 맞아 쓰러진 박정희를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은 화장실에 잠시 숨었다가 다시 나와 경호원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 김재규는 차지철의 폐와 복부를 향해 총을 쏘아 절명시켰다. 김재규는 박정희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쳐 어디엔가 숨었다. 김재규는 쓰러져 있는 박정희의 후두부에 다시 총을 쏘았다. 오른쪽 귀 윗부분에서 들어간 총알은 지주막을 꿰뚫은 후 박정희의 왼쪽 콧잔등 밑에서 멈추었다. 머리의 총격 또한 치명상이었다.

10.26의 후유증은 비교적 빨리 가라앉았다. 군지휘체계도 안정돼 가고 사회질서도 점차 제대로 자리를 잡아갔다. 군지휘부에서는 서울시내에 투입됐던 20사단 병력철수 문제가 거론됐고 치안유지를 경찰한테 넘겨도 될 것 같다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다. 특히 외국언론에서도 국내질서의 빠른 안정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군지휘부에서 그렇게 한숨을 돌릴 즈음 또하나의 커다란 현대사의 물줄기를 역류시킨 사건이 터져나와 나라 안을 온통 발칵 뒤집어놨다.

12월12일 저녁 6시30분 3군사령관 공관에서는 경기지역 계엄분소장인 이건영 장군의 주최로 계엄간담회 겸 조촐한 저녁식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참석자는 손재식(孫在植)경기도지사를 비롯해 수원시장, 용인군수, 검찰지청장. 법원지원장, 경기지방병무청장, 인천보안부대장, 도경국장 등 17명의 경기도지역 인사들이었다. 그리고 3군사령부 참모장 신재성 소장과 헌병대장 조명기(趙明紀 육사13기)대령, 그리고 민사참모가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시국에 관한 의견을 나누며 중국식 음식을 나오는 순서대로 먹었다. 식사가 시작된 지 1시간30분이 지날 무렵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육참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신속히 병력장악과 경계를 철저히 해달라고 당부했다.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장군은 신 참모장에게 즉시 부대로 돌아가 참모 비상소집 및 지휘관 정위치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조 헌병대장에게는 3군 관할 서울 외곽도로의 모든 검문소에 검문검색을 강화해 총장의 행방을 확인토록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이 장군은 부대에 비상이 걸렸다고 말한 뒤 자신도 서둘러 사령부 상황실로 직행했다. 상황실에는 벌써 작전참모 한철수 준장, 기획참모 민태구 준장 등 참모들이 비상연락을 받고 나와 있었다. 밤 9시를 기해 3군사령부에서 각 예하부대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이 장군은 참모들과 함께 연대단위까지 일일이 전화를 걸어 지휘관의 정위치 여부 및 부대동향을 체크했다. 지휘관 중 몇 사람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았다. 황영시 1군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노태우 9사단장 등이 행방불명이었다. 지휘계통에 상당한 문제가 있음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밤 9시30분쯤 윤성민 참모차장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때야 이들이 경복궁 30단에서 회합 중이라는 사실과 사태의 심각성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고민은 다음이었다. 밤 10시가 조금 넘어 장태완(張泰玩)수경사령관으로부터 보안사령관이 특전사령관과 헌병감, 그리고 자신을 연희동으로 유인해 식사에 초대됐던 내용을 설명하면서 사태수습을 위한 병력지원을 요청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장군은 고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병력출동을 섣불리 했다간 자신의 예하부대끼리 유혈충돌을 벌여야 하는 사태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북한군에게 대북경계의 허점을 보여줄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뭐가(체포조) 들어갈 겁니다.”

때마침 노재현 국방장관한테 병력출동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결국 이 장군은 병력출동을 포기함으로써 아군끼리의 유혈충돌은 피했지만 자신은 보안사에 연행되어 54일동안 조사를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장군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예하부대의 동향을 한참 파악하고 있을 시각, 이미 보안사로부터 자신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면서 “당시 이규식(李圭植)육본정보처장이 이를 전화로 귀띔해주었다.”고 말했다. 이는 12.12당시 육본정보처에서도 전화 감청 등으로 신군부측의 움직임을 나름대로 크로스체크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 장군의 수첩에는 당시 이규식 정보처장과의 통화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이장군)나요”
“별일 없으시죠?”
“(이장군)그래요.”
“정문경비 잘 하십시오.”
“(이장군)무슨 일 있어?”
“밖에서 뭐가 들어갈 겁니다.”
“(이장군)그래? 뭣 때문에...”
“그런 일이 있습니다.”
“(이장군)알겠어요.”
“사령관님 잘 지키셔야 합니다.”
“(이장군)음, 알겠어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공관에 있던 1개소대 헌병병력을 급히 불러 사령부 주위를 경계토록했다.

긴박했던 12.12 움직임이 녹음됐다.

필자는 1995년 이 장군과 인터뷰를 하면서 12.12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담은 녹취록을 입수했으나 직접 게재하지 못하고 타사 월간지에서 녹음테이프와 함께 게재됐다. 다음은 그 중 통화 내용 일부.

12일 저녁 8시50분. 육군본부 윤성민 참모차장과 이건영 3군사령관 통화.

윤:에, 지금 혼선이 상당히 벌어지는데….
이:내 여기 부관한테 잠깐 얘기 들었는데 말씀 좀 하세요.
윤:그래서 7시40분경에 권정달 대령하고….
이:권영달?
윤:권정달… 권정달 정보처장하고 우경윤 대령.
이:우경윤?
윤:범수단장. 그래서 아마 총장님을 납치해 갔다 이렇게 됐는데 그것이 아니고 이제 약간 확인해 보니까 그 안가(安家)사건 때문에 한번 조사하려고 한 것이 이렇게 됐다… 그런 얘깁니다. 그래서 조금 더 기다려봐야 사건 내용을 알겠습니다.
이:그렇더라도 총장님이 어떻게…. 그래서 내가 말이오, 지금 모든 부대들은 부대 이동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허가하기 전에는 동원하지 말아라, 그리고 검문소에다 전부 지시를 해가지고 총장님 싣고 가는 게 있으면 붙들어라. 그렇게 지금 헌병한테 지시를 해놨는데….
윤:총장님은 어디 가 있느냐, 그러니까 보안사령관이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
이:보안사령관이 그래요?
윤:예, 나하고 통화했습니다.
이:지금?
윤:예.
이:그럼 그렇게 뭐할 필요 없나요.
윤:예. 그렇게 할 필요가 없고 ‘진돗개’는 그것을 취소하라고 했습니다.
이:난 아직 ‘진돗개’ 내리지 않고….
윤:예, 내리지 마세요.…
이:음.
윤:그건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이:지금 어디 계신 건 확실하구먼.
윤:예, 제가 지금 b-2 벙커입니다.
이:그렇더라도 장관님한테 허가도 안 받고 어디 그럴 수 있나….
윤:예, 지금 또 어디서 전화 왔습니다.
이:알았습니다. 전화받으시고.
윤:예, 들어가십시오.

12일 밤 10시16분,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통화.

이:응.
장:그러니까 헌병감이 턱 들어오더니 총장님이 피습당한 것 같다….
이:총장이 뭐라고?
장:총장님이 피습당한 것 같다… 이렇게 탁 돼 가지고 그래 제가 확 나가면서 총장님 공관에 전화를 딱 걸으니까 공관의 경호대위 김 대위가 탁 나오더니 “사령관님, 지금 빨리 앰뷸런스를 좀 보내주고… 총장님이 피습당했습니다” 이렇게 아주 경황없이 이야기를 해요. 알았다, 그러면서 제가 전화를 딱 끊고 바로 거기서 제가 차를 몰고 부대에 들어오면서 바로 부대 출동 태세를 갖춰놓고 APC하고 병력을 총장 공관으로 우선 급파하라고 시켰지요

12.12 밤, 절박한 명령 “그 출동하면 안돼.”

▲ 사진=mbc 화면 캡처

13일 새벽 1시50분쯤, 이건영 장군과 구창회 9사단참모장과의 통화.

이: 9사단 30연대가 어디 출동하는 모양인데 어디 출동시키는가.
구: 연대 출동 안합니다.
이: 그런데 어디 출동한다고 그러는데 무슨 소리야.
구: 연대가 말입니까.
이: 응
구: 연대 출동 안합니다.
이: 지금 9사단 30연대장이 삼송리까지 출동한다고 전화가 왔는데?
구: 연대출동 안 합니다.
이: 사단에서 그런 지시 한적 없어요?
구: 예, 연대 출동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 그럼 뭣이 출동 하는 게 있나?
구: …
이: 여보시오, 그 출동하면 안 돼.
구: 예.

이렇듯이 12.12 그날 밤은 신군부측과 육본측의 대치상황으로 지휘관들은 초긴장 상태였으며 육본측 지휘계통에 여러 혼선이 빚어져 결과적으로 초기진압을 못했다고 이 장군은 회고했다. 이 장군은 12월13일 새벽 5시쯤 국방부장관한테 연락을 받고 국방부청사로 갔다가 미리 대기해 있던 보안사병력들에 의해 서빙고 보안사분실로 연행된 뒤 강제 전역조치 당했다.

▲ 김문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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