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죽의 장막’ 중국의 벽마저 허물어라

소련과의 비밀접촉에서 ‘학술교류 합의’라는 소기의 목적을 거두자 유 부장은 내친 김에 또 다른 극비채널을 가동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죽의 장막’인 중국의 벽마저 허문다는 작전이었다. 크렘린궁의 적극적인 자세로 더 한층 자신을 얻은 유 부장이 때를 놓지지 않으려고 곧바로 중국을 겨냥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 부장의 마음은 여간 편하지가 않았다. 중국의 상황은 소련과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었다. 중국 역시 한국의 적성국가였고 6.25때 직접 참전하는 등 북한과의 밀착관계가 소련보다 한층 더 공고하다는 점에서 여간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 부장은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죽의 장막’을 거둘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남북간의 긴장완화에 크게 기여하는 것은 물론 남북정상회담까지 내다볼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여러 날 고심 끝에 유 부장은 묘안 하나를 짜냈는데 그것은 소련의 경우에는 ‘대사급’ 관리를 파견했지만 중국은 전혀 의외의 인물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기업인이었다. 국내 S그룹의 임원인 그는 워싱턴을 통해 접촉루트를 삼았으며 베이징에 밀파돼 중국 공산당 고위간부들과 두세차례 비밀회동을 가졌다. 유 부장은 당시 베이징-서울간의 극비접촉의 결과에 대해서는 “그쪽 관계자들이 한국의 경제발전 등에 매우 호의적이었으나 평양과의 접촉건은 차차 두고보자는 신중한 편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중국과의 비밀접촉이 비록 소련처럼 구체적인 성과를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6.25 이후 첫 접촉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군부대 거액 뿌리는 미모의 여인을 추적하라”

▲ 사진=kbs 화면 캡처

유 부장은 안기부장 재임 시절 올림픽을 유치하는 큰 업적을 쌓았지만 뜻하지 않는 사건으로 안기부장직을 내놓는 시련도 겪었다. 다름 아닌 5공화국 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철희 장영자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이 사건으로 대통령 비서실의 허화평 정무, 허삼수 사정수석 등 이른바 5공실세들이 퇴진하는 계기가 될 정도로 사건의 파장은 실로 컸다.

‘이철희 장영자’의 미심쩍은 행각을 맨 먼저 포착한 곳은 안기부도 검찰도 청와대 민정수석도 아닌 보안사였다. 더욱이 전두환 사령관 재임때였다는 점에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80년 7월 어느날. 보안사 보안처(처장 정탁영 준장) 안테나에는 매우 주목을 끄는 첩보 하나가 잡혔는데 어느 미모의 여인이 군부대 불교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거액의 돈을 뿌리고 다닌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각 해당 부대장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액을 선뜻 내놓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이 첫 번째 체크된 곳은 당시 서울 필동의 수경사령부(사령관 노태우) 보안대였다. 당시 수경사에는 ‘충정사’(忠正寺, 1993년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해 헐렸음)라는 절을 짓고 있었는데 문제의 여인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나 2천만원이라는 거액의 시주돈을 내놓았다는 사실이 수경사 보안대에 포착됐던 것이다. 또한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전방 6군단사령부 법당건립에 1천만원 △해군본부 법당건립에 5천만원 △태릉 육사교정 불교행사에 나타나 거액의 돈을 시주했다는 등 각 부대에 파견된 보안사 요원들로부터 관련첩보가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안사는 대공 용의자일 가능성이 짙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그 여인에 대한 추적을 은밀히 착수하게 이르렀다. ‘이름은 장영자, 나이 40세, 법명은 장보각행이며 상당히 돈이 많은 재력가로 행세’ 보안사는 우선 그의 불교관계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는데 1970년대 후반 북악산의 ‘대정토사’라는 절을 사들이면서 불교행사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장 여인은 소문과 달리 빚독촉을 받고 있다는 점도 밝혀졌다. 따라서 보안사는 ‘군대내의 불교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침투를 위한 하나의 방편일 것’이라는 용의점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각종 첩보를 캐는데 주력했다.

각 부대에 ‘장 여인의 미소를 조심하라’ 지휘조언

▲ 사진=kbs 화면 캡처

장 여인을 ‘요주의 인물’이라는 딱지를 붙여 집중 관찰대상으로 지목하는 한편 각 부대에 ‘장 여인을 조심하라’는 지휘조언을 보냈다. 이 때부터 신군부를 향한 미소가 서서히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장 여인은 5공출범과 함께 사기행각을 바꾸게 된다. 형부 이규광(李圭光)씨가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이라는 점을 은근히 퍼뜨리면서 청와대를 팔고 다녔던 것이다. 특히 중앙정보부 출신인 이철희씨와 결혼한 후부터는 ‘안기부’ 이름까지 들먹거리며 뒷 배경이 막강하다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고 다녔다. 그 여인이 설립한 대화산업에는 실제로 중정간부 출신들을 데려다 쓸 정도였다. 이같은 장 여인의 행각을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도 뒤늦게 눈치를 챘다. 결국 이학봉(李鶴棒) 민정수석은 보안사로부터 추적자료를 넘겨받아 나름대로 내사를 펼쳐나갔다. 이 때가 1981년 1월 검찰의 정식수사가 시작되기 1년4개월 전이다. (검찰수사는 82년 4월 어음사기를 당한 공영토건의 진정에서 시작됐다.)

이같은 정보는 안기부에 의해서도 당연히 체크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안기부에서는 그의 행각이 어음사기가 아닌 ‘청와대 사칭’쪽으로 포커스를 맞췄다. 특히 중정차장까지 지낸 이철희씨가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 유 부장을 상당히 곤혹스럽게 했다. 이철희(육사2기)씨와는 육군대학 동기로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유 부장은 이씨에게 “권력의 비호를 받는 것처럼 행세하지 말아달라.”고 몇차례 부탁하기도 했다. 1981년 7월 장영자 부부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도 ‘한국의 재력있는 실력자 장씨 부부가 알라배마에 광산을 개발한다.’는 외신보도가 나오자 유 부장은 급전을 쳐 빨리 귀국토록 했다.

결국 82년 5월7일 대검중수부에서 이철희 장영자 부부를 구속하자 사건의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또한 연일 신문기사가 이 사건으로 장식되면서 ‘정의사회구현’ ‘깨끗한 정부 실현’ 등을 내세운 5공정권에 치명타가 가해지기 시작했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