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 신수(身數, 운수)의 계절이다. 요즘은 주로 30대가 주 고객층이다. 나라가 풍전등화이니 30대 또한 바람 앞에 등불처럼 불안하다. 어떻게 살아야하나. 의외로 사주들이 좋다. 베이비부머(전후세대) 세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불안하다. 지난해 미국 퓨리서치센터 설문 조사에서 전 세계 17개국 중, 대한민국은 ‘물질적 풍요’를 1위로 꼽았다. 가족의 화목이나 건강이 아니라, 돈을 삶의 최고 의미로 선택한 것이다. 그 기사를 보고 한참 가슴이 먹먹해 딴 짓을 하다 다시
[미디어파인=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 드디어 만났다. 그래봐야 햇수로 2년만이다. 그녀가 인천으로 이사한 이후로는 일 년에 한 번쯤은 꼭 만난다. 지난여름부터 만나자고 했으나, 지난여름은 가혹했다. 그 가혹한 무더위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지쳐있었다. 결국 또 해를 넘기고서야 만났다. 여고 때부터 보아 온 오랜 친구다. 이순 중반을 넘겼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여고 때의 얼굴 그대로다. 약속한 일식당 복도에서 마주친 그녀와 손은 잡고 소녀처럼 뛰었다. 살아있는 그녀가 너무 기뻐서. 그녀는 남편과 같이 왔다. 후덕한 남편은 눈이
[미디어파인=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 매일 아침 나는 그레고르 잠자(카프카의 ‘변신’ 주인공) 같다. 머리만 살아있고 몸은 굳어 있어, 내 몸이 벌레로 변했는지 살펴본다. 다행이 벌레로 변하진 않았다. 몸을 천천히 움직여 본다. 마치 미이라가 붕대를 풀고 관에서 천천히 깨어나는 듯하다. 뜨거운 모닝커피를 마시자 비로소 정신이 돌아온다. 일찍도 찾아온 무더위. 먼 산의 구름이 빠르게 흘러간다. 우릉우릉 하늘이 운다. 시간당 76mm 폭우. 극한호우 경보가 울린다. 세상이 물에 잠기고 있다. 침침해지는 눈, 현저히 줄어든 독서량. 읽
[미디어파인=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 영화는 언제나 혼자 본다. 꽤 오래된 습관이다. 아들과 조조타임을 즐겨보곤 했지만 지금은 일열 일번밖에 없는 홈 시네마에서 혼자 본다. ‘듄’은 55인치 TV로 보기엔 아까운 영화다. 사운드가 좋고 스크린이 아이맥스급(32m)인 영화관에서 봐야 할 장대한 스페이스 오페라다. 우주에서 펼쳐지는 모험과 전쟁을 소재로 다룬 작품을 ‘스페이스 오페라’, 라고 한다.듄은 1965년부터 20년간 쓴 프랭크 허버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모든 SF영화의 모티브를 제공한 작품이기도 하다.
[미디어파인=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 관심(觀心), 마음을 바라보는 걸 말한다. 최근, 마음이 아프면 몸이 아프다는 말을 절감했다. 여러 일이 중첩 되면서 급기야 응급실에 가서 피검사를 하고 링거를 맞고 정신이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극심한 마음의 스트레스가 고통으로 작용해 마음이 아프더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온 몸의 통증으로 나타났다. 내게 노인들의 성(性)에 대해 생각하게 한 건 어느 인품이 훌륭하다고 생각한 분(82세)이 후배에게 추잡스럽게 굴은 일로부터 시작한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졸고 ‘미네르바의 부엉이’라는 산
[미디어파인=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 이제 좀 잠잠해 졌나? 무슨 심보인지 모르지만 극찬하는 영화나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보지 않는다. 그전에 먼저 보거나, 아니면 거품이 꺼지길 기다린 다음 본다. 찬찬히. 모든 선입견이 머리에서 지워질 때 쯤 말이다. 이제 봤다, ‘노매드랜드(Nomadland, 2021, 클로이 자오 감독).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이다. 일단 미국에 사는 중국인 영화감독 클로이 자오, 그 자그마한 여인에게 기립박수 보낸다.이 영화는 자본주의에 물들대로 물든 ‘우리 안의 얼어버린
[미디어파인=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 관종(關種), 관심종자의 줄인 말이다. 종자(種子)는 식물의 씨앗을 말하는데, 사람의 혈통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영어로 ‘어텐션 호올(attention whore, 관심병 환자)'이라고 한다. 어텐션은 주목하라는 뜻이고, 호올은 매춘부, 절개가 없는 여자, 혹은 오입을 하다는 뜻이다. 이 두 단어가 합해져 관심종자, 관심병 환자로 번역된다. 풀이하자면 주목받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 쯤 될 것이다. 호올이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진 않는다. 가령 푸드 호올(food whor
[미디어파인=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 화양연화(왕가위 감독, 2000)는 ‘난처한 순간이다. 여자는 수줍게 고개를 숙인 채 남자에게 다가올 기회를 주지만, 남자는 다가설 용기가 없고, 여자는 뒤돌아선 후 떠난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이 숨 막히게 아름다운 영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거다.화영연화(花樣年華)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말한다. 나비난의 하얀 꽃이 허공에서 툭툭 터지는 무료한 봄날의 끝 무렵, 리마스터링 한 화양연화를 본다. 몇 번째 보는지는 모르겠다. 명작이란 이런 거라고 왕가위는 한 수 가르쳐
[미디어파인=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 카르마(Karma), 업(業)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심신의 활동과 일상생활을 말한다. 혹은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은 응보(應報)를 가리키기도 한다. 나는 후자만 업이라고 알고 있었다.인생의 쓴맛을 알기 시작한 게 언제였을까. 고3 때의 입시 중압감은 이빨도 안 들어간 거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천지도 모르고 첫사랑과 결혼한 25세부터 신(神)은 내게 인생의 쓴맛과 짠맛을 알게 해 주었다. 나의 카르마의 시작이었음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업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