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이 우리를 보호한다?…‘우주 검열’ 가설, 50년 미스터리 풀릴까
블랙홀이 우리를 보호한다?…‘우주 검열’ 가설, 50년 미스터리 풀릴까

[미디어파인=이상원 기자] 블랙홀은 흔히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 파괴적 존재로 묘사된다. 그런데 만약 블랙홀이 위험을 감추는 보호막 역할을 한다면 어떨까. 마치 우리가 아는 물리 법칙이 무너지는 지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효과를 ‘검열’해 준다는 것이다. 얼핏 장난처럼 들리지만, 이는 이른바 ‘우주 검열’로 불리는 물리학 난제의 핵심 질문이다. 그리고 최근 물리학자들은 이 수수께끼의 해답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고 말한다. 블랙홀 내부는 우리가 아는 물리가 끝나는 곳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공간이 무한대로 휘어지고 중력이 무한정 강해지는 ‘특이점(singularity)’이 존재한다. 이때 방정식 자체가 더 이상 성립하지 않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지금의 이론으로는 알 수 없다.

물리학의 기본 원칙은 실제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논리적 설명이 가능해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블랙홀 내부 특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과 중력을 통합한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 이론을 찾기 전까지 특이점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완벽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다행히 지금까지 알려진 특이점은 블랙홀 내부에 ‘숨겨져 있어’ 우리 외부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만약 이 특이점이 바깥에 그대로 노출된다면 어떨까. 아직 완벽한 이론이 없기 때문에 그런 ‘벌거벗은 특이점(naked singularity)’이 실제로 일어나면 일반상대성이론의 예측력이 무너질 수 있다. 중국 양저우대학의 옌 친 옹 박사는 “벌거벗은 특이점은 일반상대성이론을 제대로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영국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는 1960년대에 이 분야 연구로 훗날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우주에서 특이점이 드러난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다. 펜로즈는 여러 단서를 모아 ‘우주 검열 가설’을 내놨다. 자연의 어떤 원리, 즉 ‘검열 기제’가 작동해 특이점을 블랙홀 내부에 가둔다는 추측이다. 물리학자들은 이 개념이 직관적으로 타당하다고 믿지만, 50년 넘게 이를 확증하거나 반박할 증거가 확실히 나오지 않았다. 펜로즈의 초기 작업 이후 몇십 년 동안은 우주 검열이 성립한다는 쪽을 지지하는 연구가 많았다. 그런데 2010년, 물리학자 루이스 레너와 프란스 프레토리우스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블랙홀 바깥 경계가 분열되고, 그 결과 벌거벗은 특이점이 남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다만 이 과정(‘그레고리-라플람 불안정성’)은 공간 차원이 세 개(3D) 이상인 우주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즉, 우리의 3차원 우주에선 발생이 불가능하다는 ‘단서’가 붙었다.

그렇더라도 이 결과는 의미가 크다. “우리 우주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아니다’라는 결론이 나온다면, 어떤 메커니즘이 벌거벗은 특이점의 출현을 막는지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런던 퀸메리대학의 파우 피게라스 박사는 “완벽한 증명은 아니지만, 특정 과정을 통해서만 우주 검열이 깨어질 수 있고 현실 우주에서는 그 과정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우주 검열이 참임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레너와 프레토리우스의 성과 이후, 우주 검열 가설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피게라스에 따르면 지난 10년 사이 컴퓨터 기술이 발전하면서 블랙홀이 어떻게 진화하고 붕괴하는지를 더 정밀하게 모사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추가 차원’을 가정하는 우주 모형에선 벌거벗은 특이점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흔히 발생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예를 들어 피게라스 팀은 블랙홀이 충돌할 때 벌거벗은 특이점이 나타나는 시나리오를 모델링해 보였다. 우리 우주에서도 블랙홀 충돌은 실제로 일어나지만, 3차원 우주에선 최종 결과물이 언제나 블랙홀 내부에 특이점을 가둔 채 끝난다는 점을 확인했다.

물론 펜로즈 가설을 최종적으로 확증하거나 반박하는 일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럼에도 우주 검열 논쟁이 50년 이상 지속되면서 얻은 통찰은 이미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옌 친 옹 박사는 “가설의 진위 자체보다, 그 탐구 과정에서 무슨 도구가 개발되고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며 “결국 그 여정 자체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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