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파인=이상원 기자] 어릴 적만 해도 우리 태양계엔 아홉 개의 행성이 있었다고 배웠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아는 ‘행성’은 수천 개에 달한다. 물론 그중 대부분은 외계행성, 즉 지구가 아닌 다른 별 주위를 도는 ‘이방별’의 행성들이다. 정작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은 공식적으로 여덟이라고 한다. 혹은 일부 천문학자들의 주장대로 해왕성 너머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대형 천체가 존재한다면 다시 아홉일 수도 있다. 물론 명왕성(Pluto)을 여전히 행성으로 여기고, 더 나아가 왜행성(dwarf planet)까지 모두 포함한다면 태양만을 도는 ‘행성’은 수천 개가 될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행성의 수나 정의를 둘러싼 이야기는 제법 혼란스럽다. 하지만 사실 그 문제는 곧 우리가 ‘행성’이란 단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 ‘행성’의 시작, 그리고 명왕성 논쟁
겉보기엔 “행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무척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외로 까다롭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어에서 ‘플라네테스(planetēs)’는 ‘떠도는 별(방랑자)’이라는 뜻이다. 밤하늘의 밝은 점들이 일정 기간마다 움직여 보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그 정의대로라면 태양과 달도 행성으로 분류돼 버린다. 물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양과 달을 행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혜성이나 소행성도 이렇게 보면 다 ‘방랑자’가 되니, 이 역시 너무 포괄적이다. 현대적 기준은 좀 더 복잡하다. 2000년대 초까지는 큰 논란 없이 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토성·천왕성·해왕성·명왕성, 이렇게 ‘아홉’이 태양계 행성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곧 난관이 찾아왔다. 해왕성 궤도 밖에서 얼음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세드나(Sedna), 콰오아(Quaoar), 에리스(Eris) 같은 천체가 줄줄이 발견된 것이다. 이들은 크기도 최소 직경 1,000km 이상으로 상당히 커서, 그중 에리스는 2,300km를 넘어 명왕성과 비슷하거나 질량 면에선 오히려 더 무겁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에리스의 존재가 공식 발표된 건 2005년. 그때 발견을 주도한 천문학자 마이크 브라운은 미 항공우주국(NASA) 보도자료에서 에리스를 “10번째 행성”이라 칭했다. 당시에는 에리스가 명왕성보다 약간 더 크다고 여겨졌기에, 만약 명왕성을 행성으로 본다면 에리스도 행성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논리였다. 이후 추가 관측으로 에리스가 실제로는 명왕성보다 조금 작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태양계에 행성이 도대체 몇 개인지를 둘러싼 혼란이 커진 것이다. 이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국제천문연맹(IAU)은 행성 정의를 논의하는 위원회를 꾸렸고, 다양한 제안이 나왔다. 그중에는 화성과 목성 사이 소행성대에서 가장 큰 천체인 ‘세레스(Ceres)’를 행성으로 인정하자는 안도 있었다. 그러나 세레스는 일반적인 행성이라고 하기엔 작고(약 940km급), 많은 행성학자들은 태양계 초기 형성 과정에서 덩치가 충분히 커지지 못한 ‘원시 행성(protoplanet)’에 가깝다고 본다.
결국 2006년, 국제천문연맹은 ‘행성’에 관한 세 가지 조건을 정했다.
1. 태양을 공전해야 한다.
2. 충분한 질량을 가져 스스로 중력으로 둥근(구형) 모양이 되어야 한다.
3. 공전 궤도 주변에서 중력적으로 지배적인 천체여야 한다. (이 부분에서 ‘궤도를 완전히 깨끗이 치운다’는 의미로 잘못 이해될 여지가 있었지만, 요지는 ‘그 궤도에서 결정적 주도권을 가진 가장 큰 존재냐’ 하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첫 두 조건을 만족하지만 세 번째 조건에 해당되지 않으면 ‘왜행성(dwarf planet)’이라고 부른다. 결국 명왕성은 해왕성과 궤도를 공유하거나, 주변에 비슷한 왜행성들이 많다는 점에서 이 세 번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봤다. 그래서 기존에 ‘아홉 번째’였던 명왕성은 이제 ‘왜행성’으로 분류가 변경됐다. 이를 놓고 천문학자들과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찬반이 갈렸고, 명왕성의 ‘강등’에 대해 여전히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후로도 다양한 정의와 수정안이 나왔지만, 상당수는 ‘명왕성을 어떻게든 다시 행성으로 복귀시키려는 역공학’이라는 비판을 받곤 했다. 실제로 이를 허용하면 에리스 같은 비슷한 조건의 천체도 행성으로 편입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잠재적으로 수백~수천 개의 ‘행성’을 인정하게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지름이 대략 400km 이상이면 중력으로 둥글게 될 가능성이 있는데, 해왕성 너머 깜깜한 구역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얼음 천체가 무수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태양계 행성이 수천 개가 된다 한들, 과학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행성’이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가 너무 희석될 수도 있기에, 우주 분야 연구자들의 다수는 ‘태양계 행성은 여덟 개’ 혹은 ‘아홉 개(명왕성을 포함)’ 정도로 구분하고 있다.
■ “행성이란 개념 자체가 경계가 모호”… 고정된 기준은 없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가 ‘행성’에 대한 통일된 정의를 몇십 년째 갖추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자연에 그런 명확한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명왕성 ‘강등’의 중심에 있던 마이크 브라운은 저서 『How I Killed Pluto and Why It Had It Coming』에서 “행성(planet)은 사실 정밀한 정의라기보다 개념에 가깝다”고 썼다. 그 말처럼, 질량·크기·형태·궤도 등 어떤 기준을 적용해도, 경계선이 자의적으로 정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이는 자연과학 전반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해온 분류나 정의는 대체로 인위적인 경계 설정일 뿐, 자연 자체가 날카롭게 경계를 그어 놓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색깔만 해도, 파장이 620nm 안팎이면 빨간색, 590nm쯤이면 주황색 등으로 구분하지만, 이는 인간이 편의상 절단선을 그어 놓은 것일 뿐이다. 실제로 색깔은 연속된 스펙트럼이고, 빨강과 파랑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중간 단계가 존재한다. 이 같은 예는 성별이나 종(種) 구분, 정치적 성향 등 수많은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극단적으로 다른 예시들을 보면 쉽게 ‘둘 중 하나’로 나누고 싶어지지만, 그 사이 경계에 있는 사례를 보면 구분이 모호해진다.
우리가 사물을 딱 떨어지게 구분하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지만, 실제 자연은 그러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행성을 어떻게 정의하든, 그 경계선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임의의 규칙일 뿐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논란에 빠지기보다는 ‘우주란 원래 그렇다’는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고, 결과적으로 태양계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