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블랙홀의 ‘급속 폭식’… 빠른 섭취 현상으로 빛이 요동치는 이유는?
거대 블랙홀의 ‘급속 폭식’… 빠른 섭취 현상으로 빛이 요동치는 이유는?

[미디어파인=이상원 기자] 초질량 블랙홀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먼지와 가스의 원반을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해체하고 삼켜버릴 수 있다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는 유독 빠르게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특정 준항성(퀘이사)의 수수께끼를 설명해줄 가능성이 있어 주목된다. 보통 태양 질량의 백만 배에서 최대 10억 배까지 달하는 초질량 블랙홀은 은하 중심부에 위치해 주변의 물질 원반을 빨아들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원반은 블랙홀이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는 한계 지점, 즉 사건의 지평선 주변에 납작하게 펼쳐져 있다. 과거에는 블랙홀이 이 물질을 소진하는 데만 수세기에서 수천 년이 걸릴 것으로 추정됐지만, 이번 연구에서는 고작 몇 달에서 몇 년 사이에도 내부 원반을 전부 빨아들일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제시됐다. 이와 같은 시뮬레이션 결과는 일명 ‘변광 준항성(changing-look quasar)’ 관측 사례와도 일치한다. 준항성은 블랙홀이 먼지와 가스를 삼키며 막대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은하 핵을 일컫는데, 변광 준항성들은 몇 달 만에 밝기가 급격히 변해 기존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초질량 블랙홀이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밝기를 껐다 켰다 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이상했습니다.” 이번 연구를 이끈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천체물리학과 대학원생 닉 카즈는 그렇게 말하며, “이 의문을 풀면 우리 은하를 포함해 모든 은하 중심부의 초질량 블랙홀이 어떻게 형성되고 성장해 왔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초창기 블랙홀 이론은 변광 준항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카즈는 과거 모델이 블랙홀과 주위 물질 원반이 완벽히 같은 면에서 동일한 방향으로 회전한다고 가정했다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제는 강력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덕분에 훨씬 복잡한 각도와 움직임을 고려할 수 있게 됐습니다.”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연구팀은 세계 최고 성능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 오크리지국립연구소의 ‘서밋(Summit)’ 슈퍼컴퓨터를 활용해, 블랙홀과 원반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기울어진 상태의 3차원 모델을 구축했다. 그 결과, 완벽한 수평 상태로 도는 LP판처럼 매끄럽게 회전하기보다는, 팽이처럼 흔들리는 복잡한 움직임을 보였다. 카즈에 따르면, 블랙홀에 가까운 부분일수록 회전력을 강하게 받고 먼 부분은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원반이 갈라지려는 자연스러운 경향이 나타난다. 하지만 마찰과 자기장이 이를 붙잡아 두려 하면서 끊임없이 충돌이 벌어진다. “쉽게 말해, 블랙홀이 원반을 잡아당겨 찢으려는 힘과 원반 내부의 유체역학적·자기장적 요소들이 붙잡고 있으려는 힘 사이에 치열한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셈입니다.”라고 카즈는 부연했다.

그렇게 벌어진 은하 규모의 줄다리기는 시공간 자체를 왜곡시키기에 이른다. 특히 사건의 지평선 가까이에서 왜곡이 심해지면서 원반은 안쪽 부분과 바깥쪽 부분으로 갈라진다. 연구팀에 따르면, 이렇게 분리된 두 개의 원반은 격렬한 충돌을 일으키면서 안쪽 물질을 블랙홀 쪽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비어버린 내부는 곧바로 바깥 원반 물질로 재충전되며 다시 한 번 같은 과정을 반복하다가 모두 빨려 들어가고 만다. 카즈는 이러한 폭력적인 순환이 곧 변광 준항성이 보여주는 급격한 밝기 변화를 뒷받침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우리가 제시한 새로운 메커니즘이 관측 결과와 꼭 맞아떨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아직 해명이 되지 않은 관측 현상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도 있을 거예요.”

이번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프린스턴대학교 연구원이자 플라스마 물리학자인 비센테 발렌수엘라-비야세카는 “이번 모델이 혼돈 상태의 이중 원반 구조에 대한 흥미로운 세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실험실에서 블랙홀 주변을 모사한 플라스마 원반을 만들고, 그 원반의 각도를 흔들어 카즈 팀이 발견한 동역학을 재현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블랙홀이 은하 중심에 자리 잡고 은하와 함께 진화한다는 점은 여러 연구에서 제시된 바 있습니다.”라고 발렌수엘라-비야세카는 설명한다. “초기 우주에서 초질량 블랙홀이 어쩌다 그렇게 빠르게 성장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은데, 블랙홀 역학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면 그 기원을 파악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라고 카즈 역시 부연했다.

이런 불안정한 기울기 원반 구조는 태양 질량의 서너 배에서 최대 스무 배 정도에 불과한 ‘소형’ 별질량 블랙홀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카즈는 “이 작은 블랙홀들도 기울어진 원반과 복잡한 역학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끝으로 “밤하늘에서 보이는 블랙홀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총망라하기 위해, 전 세계 천문학계가 다양한 시뮬레이션과 관측을 함께 시도하는 중”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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