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파인 = 이상원 기자] 블랙홀은 흔히 ‘주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괴물’로 그려진다. 가끔은 물리학자들이 거대 입자가속기 등에서 이런 블랙홀을 만들 수 있다는 걱정까지 제기되곤 한다. 과연 지구 자체가 이 ‘어둠의 거인’에게 빨려 들어가고 말 것인지 두려움을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지금까지 인류가 지구에서 블랙홀을 만들었다는 사례는 없고, 혹여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 영향은 제한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실제 우주의 블랙홀은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점에서만 무섭다. 이론천체물리학자인 엘리엇 퀘타트(프린스턴 대학교)는 “실험실에서 만든 블랙홀이 있다 해도 질량이 극도로 작아, 중력적 영향력이 매우 제한적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주변 물질을 마구 집어삼킬 ‘괴물’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블랙홀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이는 양자역학과 중력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는 ‘거대한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블랙홀은 태양보다 훨씬 큰 질량을 가진 별이 생을 마감할 때 형성된다. 별의 바깥층은 초신성 폭발로 사방으로 흩어지고, 중심핵은 엄청난 중력에 눌려 안으로 꺼진다. 이때 우주의 어떤 힘도 이 압축을 막지 못해, 상상을 초월하는 밀도와 질량을 지닌 ‘점’이 생긴다. 여기서 중력의 힘이 너무 강력해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그곳이 바로 블랙홀이 된다. 물론 블랙홀 근처라도 지나치게 접근하지만 않으면 안전하다. 블랙홀 주변에는 ‘사건의 지평선’이라 불리는 경계가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간 물질은 빠져나올 수 없다. 거대 블랙홀은 직경 수백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사건의 지평선을 가지지만, 작은 블랙홀일수록 그 지평선 크기가 훨씬 작다. 이론적으로 실험실에서 질량이 고작 반 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블랙홀을 만들 수 있다면, 그 사건의 지평선은 양성자보다 수조 배나 더 작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블랙홀과 입자가속기를 둘러싼 두려움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비롯됐다. 질량과 에너지가 서로 변환될 수 있으니, 엄청난 속도로 양성자를 충돌시키는 입자가속기에서 예측 불가능한 입자(혹은 블랙홀)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실제로 가속기의 에너지는 블랙홀을 형성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며, 설령 그렇게 작은 블랙홀이 생긴다고 해도 금세 에너지를 잃고 사라져버릴 가능성이 높다.
2008년 스위스 제네바 인근에 있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대형강입자가속기(LHC)가 가동되기 전, 일부 연구자는 ‘우리가 모르는 추가 차원’이 존재한다면 중력이 훨씬 강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끈이론에서 제안하는 수학적 세계관으로, 4차원(3차원의 공간+1차원의 시간) 밖에도 또 다른 차원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이다. 이 경우 중력이 생각보다 강해져 원자 수준에서조차 블랙홀을 만들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중력의 실체와 우주 구조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확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이미 2003년부터 이에 대한 검토를 진행해 왔고, 우주 공간에서 지구 대기로 날아드는 입자 충돌 에너지가 LHC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도 블랙홀이 전혀 관측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우려가 과장됐음을 지적했다. 2008년에는 이러한 전문가 보고서가 추가 자료와 함께 재발표되면서 불안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LHC에서 블랙홀 관측은 이뤄지지 않았다. 말다세나는 “끈이론을 입증할 만한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면 흥미로웠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편, 최근에는 양자컴퓨터 실험으로 ‘아기 벌쳐홀(웜홀)’을 시뮬레이션했다는 소식도 주목받았다. 벌쳐홀은 블랙홀 두 개를 연결해 공간을 잇는 가상의 개념인데, 언론에서는 이를 거대한 혁신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퀘타트는 “이번에 만들어진 것은 실제 웜홀이 아니라, 물질에 나타나는 특이한 양자 역학적 현상으로 수학적으로만 벌쳐홀 성질을 모사한 것”이라고 짚었다. 그럼에도 말다세나는 “앞으로 양자컴퓨터 성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면, 아인슈타인 방정식을 활용해 블랙홀을 모사하는 ‘인공 블랙홀 모델’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렇게 되면 소형 ‘블랙홀’을 시뮬레이션하며 그 복잡한 거동을 정밀하게 연구하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퀘타트가 실제 실험실에서 블랙홀을 구할 수 있다면, 가장 관심이 가는 대목은 바로 강착원반(블랙홀이 주변 물질을 빨아들이며 빛을 내는 현상)이다. 그는 “블랙홀에 물질을 조금씩 던져주면, 그 물질이 블랙홀 주변에서 소용돌이치며 강력한 빛을 발산한다”면서 “이 과정을 통제된 환경에서 관찰한다면, 우리가 아직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강착원반의 작동 원리를 밝히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