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파인=이상원 기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백악관에 복귀하면서 벌어지는 전례 없는 행보 속에, 미국 과학계가 ‘어두운 미래’를 맞이할 것이란 우려가 급부상하고 있다. 취임 후 며칠 되지 않아 잇달아 서명된 행정명령들과 핵심 보직 지명안이 지난 75년간 미국 경제를 견인해온 과학·기술 역량을 뒤흔들 위험 신호라는 것이다. 트럼프는 선거운동 기간부터 연방 예산의 대규모 삭감과 ‘반항적’이라 지목한 관료 퇴출, 그리고 자신 취향에 맞지 않는 증거 기반 정책을 ‘산산조각내겠다’고 공언해 왔다. 지금 그는 하원의장 마이크 존슨과 막대한 자금 지원을 하는 일론 머스크(새롭게 출범한 ‘정부효율부(DOGE)’ 수장) 등 우군의 도움을 받아, 이 약속들을 하나씩 이행 중이다.
트럼프의 행정부 고위직 지명자만 봐도 그의 과학 경시 기조가 분명해진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보건복지부(HHS) 장관으로 지명된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다. 법학 교육을 받았지만, 백신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예산 약 500억 달러 규모의 미국 국립보건원(NIH) 등 바이오메디컬 연구의 핵심 기관을 지휘할 가능성이 생긴 셈이다. 또 다른 인사인 크리스 라이트는 셰일가스 추출(프래킹) 업계 경영자로, 에너지부 장관 지명을 받았다. 그가 노골적으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 과학계가 경고하는 ‘온난화로 인한 극단적 기상 현상 증가’에 회의적 입장을 보인다. 온실가스 감축이 필요한 시대에 화석연료를 더 뽑아 쓰자는 ‘드릴, 베이비, 드릴’ 구호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셈이다.
이 두 사람의 면면은 트럼프 자신의 ‘반과학’ 행보를 더욱 부각한다. 그는 기후변화를 “사기”라고 주장했고, 풍력발전기를 과학적 근거 없이 ‘고래를 죽이는 주범’이라고 비난했으며, 실제 존재하지 않는 수로 밸브가 꺼져 산불 피해가 커졌다는 등 근거 없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첫 임기 때는 코로나19를 상대하며 의학적으로 위험한 엉터리 약제를 고집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장은 “맑은 공기, 깨끗한 물”을 외치고 있지만, 석탄 발전 부활을 강조하는 등 과학계와 정반대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의 하천 염도 관리 정책마저 “바로잡겠다”며 뒤흔들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트럼프가 취임 첫날부터 파리기후협정 탈퇴와 세계보건기구(WHO) 탈퇴를 공식 선언한 점도 ‘국제 협력이 필수적인 과학’과 어긋난다는 비판을 초래한다. 과학이 세계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에는 그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학자 중심 전문성을 존중해 왔던 전통도 위협받고 있다고 관계자들은 우려한다. 2차 대전 이후 계속된 “과학 중시” 분위기를 뒤집는 듯, 트럼프는 해당 분야에서 오랜 연구 업적을 쌓아 온 전문가 대신 소위 ‘테크놀로지 업계 인사’를 선호하는 기조를 보인다. 스스로도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새로 만드는” 실리콘밸리 스타일에 매료된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근본 과학(기초연구)이 종종 느린 진행과 긴 투자가 필요한데, ‘빨리 만들어서 성과를 내겠다’는 태도가 이런 가치와 충돌한다는 점이다.
• 대통령 과학기술자문위원회(PCAST)를 이끌 인물로 지명된 데이비드 색스는 변호사이자 벤처투자자로, 인공지능(AI)과 암호화폐 쪽에서 명성을 쌓았다. 새 행정부에서 해당 분야 ‘황제(czar)’ 역할까지 맡을 전망이다.
•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 국장 겸 대통령 과학고문으로 낙점된 마이클 크라치오스는 트럼프 1기 때 임시 국장·최고기술책임자(CTO)를 지내며 호평을 받았다. 다만 정치학과 헬레니즘을 전공했고, 최근 3년간 AI 기업 임원으로 활동하는 등 전형적 과학자 출신은 아니다.
• 국방부 연구·엔지니어링 담당 차관으로 거론되는 에밀 마이클은 우버 출신 기업인·법학 전공자로, 국방 분야 전통적 기술 책임자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 에너지부 과학·혁신 차관에 낙점된 다리오 길은 IBM 연구소장을 역임했고 국가과학위원회(NSB) 의장도 지낸 예외적 사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실무 경력은 ‘기술자’ 성격에 가깝다.
이런 ‘과학자와 동떨어진’ 인사 배치는 예산·인력 정책과 맞물려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트럼프는 이미 전 부처에 걸쳐 신규 채용을 중단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고, 특정 직군을 해산해 충성파로 대체할 수 있는 권한을 강화했다. 이는 과학적 중립성과 전문성을 해칠 것이란 우려로 이어진다. 더욱이 트럼프가 공화당 주도의 세금 감면·국방비 증액 구상을 지지해 연방 부채 감축을 요구하는 가운데, 과학 연구 예산이 ‘가장 쉽고 빠르게’ 삭감될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게 현지 분석이다. 현재 상황 역시 좋지 않다. 트럼프의 ‘독단적 행정명령’을 위배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전까지, 모든 연방 과학 연구지원금이 전면 중지됐다. 비록 연방 법원 판결로 잠시 보류 상태에 놓였지만, 언제 다시 시행될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