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내부에는 다차원 슈퍼미로가 존재한다
블랙홀 내부에는 다차원 슈퍼미로가 존재한다

[미디어파인 = 이상원 기자] 블랙홀은 우주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천체로, 주변에 접근하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빛조차도 그 강력한 중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모든 것을 삼키는 블랙홀 내부에는 과연 어떤 흔적이 남아 있을까. 최근 끈이론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블랙홀 내부에는 다차원 구조로 얽힌 ‘슈퍼미로(supermaze)’가 존재해, 블랙홀이 집어삼킨 정보가 그 안에 보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번 연구에서 말하는 슈퍼미로는 이른바 ‘M이론’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M이론은 여러 끈이론을 아우르는 아이디어로, 우리 우주가 네 차원이 아닌 11차원을 포함한다고 가정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주를 이루는 기본 구성물은 ‘브레인(brane)’이라 불리는 다차원 진동 끈이다. 연구팀은 블랙홀 내부에 존재할 수 있는 2차원·5차원 브레인이 서로 어떻게 만나는지 지도처럼 그려낸 것이 바로 슈퍼미로라고 설명한다. 이는 블랙홀의 미세구조, 즉 양자 단위에서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남캘리포니아 대학교(USC)의 니콜라스 워너 교수는 “슈퍼미로는 벽이 겹겹이 이어지고 수많은 방과 교차점이 존재하는 매우 복잡한 구조물”이라고 설명한다. 이 벽은 곧 다양한 차원의 브레인에 해당하며, 2차원 브레인이 5차원 브레인과 만나는 지점마다 서로 작용해 구부러지거나 끌어당기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이런 슈퍼미로는 사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블랙홀’이라기보다는, 이른바 ‘퍼즈볼(fuzzball)’ 상태를 가정할 때 등장한다고 연구진은 주장한다. 퍼즈볼은 진동하는 브레인 덩어리로 이뤄진, 기존의 블랙홀과 비슷하지만 ‘사건지평(사건의 지평선)’이나 ‘특이점’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가상의 천체다. 퍼즈볼도 외견상 블랙홀과 흡사하고 질량도 비슷하나, 표면 부근에서 전통적 블랙홀과는 다른 특징을 갖는다. 

퍼즈볼 개념을 처음 제안했던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의 사미르 마투르 교수는 “연구진이 퍼즈볼의 새로운 형태(슈퍼미로)를 구축해낸 것은 흥미로운 진전”이라며, “복잡하고 까다로운 작업을 통해 퍼즈볼의 여러 변형을 제시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평했다. 그는 “이 분야의 다양한 이론적 시도가 의미 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슈퍼미로가 정말로 블랙홀 자체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지를 두고 신중한 입장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바버라 캠퍼스의 돈 매롤프 교수는 “이 연구로 제시된 퍼즈볼들이 여러 물리적 특성과 질량, 전하 등에서 블랙홀과 유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블랙홀이라 불릴 만한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고 지적했다. 또한 사건지평(사건의 지평선)이 없을 경우 블랙홀의 무질서 정도(엔트로피)를 정확히 어떻게 설명할지 명확하지 않다는 우려도 나온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원의 후안 말다세나는 “이번에 제시된 슈퍼미로 퍼즈볼 해법은 흥미롭지만, 전통적인 블랙홀이 갖는 엔트로피를 완전히 대체할 만한 해결책이라고 보긴 이르다”고 말했다.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모두 검증된 강력한 이론이지만, 서로 조화롭게 결합하는 데 여전히 큰 난관이 있다. 블랙홀 내부는 극도로 작으면서도 엄청난 질량을 지니고 있어, 이 두 이론을 동시에 적용해볼 수 있는 ‘궁극의 시험 무대’로 여겨진다. 슈퍼미로나 퍼즈볼 같은 개념은 끈이론적 접근을 통해 이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 중 하나다. 구체적으로 보면, 블랙홀이 가진 ‘정보 역설’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퍼즈볼 이론이 등장했다. 1974년 스티븐 호킹은 블랙홀이 장기적으로 증발(호킹 복사)해 결국 사라진다고 주장했고, 이는 그 안에 있던 정보가 영영 소멸되는 것처럼 보이는 역설을 낳았다. 물리학에서 정보는 절대 파괴될 수 없다는 기본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퍼즈볼 모델에서는 블랙홀이 사실은 진동하는 브레인 덩어리이므로, 어느 정도 정보가 호킹 복사에 실려 나오면서 보존될 수 있다. 워너 교수는 “슈퍼미로의 복잡한 구조는 정보를 보관할 방대한 용량을 갖추고 있다. 이 메커니즘이야말로 정보 역설을 풀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연구가 곧바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슈퍼미로가 현실 세계의 블랙홀을 완벽히 설명한다고 단언할 근거는 부족하며, 이론적 퍼즈볼과 실제 우주에 존재하는 물리 현상을 연결하는 데 필요한 추가 검증도 많다. 그러나 기존의 블랙홀 해석으로 설명이 모호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정보 역설 같은 도전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워너 교수 등 연구진은 추후 시뮬레이션과 추가 이론 개발을 통해 슈퍼미로의 완성도를 높이고, 끈이론이 제시하는 다차원 세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발판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블랙홀의 내부와 정보 보존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풀어내려는 이들의 시도가 향후 물리학계에서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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