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파인 = 이상원 기자] 한 세대 넘도록 ‘핵 사용 금기’는 인류 최후의 안전판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심리·정치학 연구가 보여 주듯, 극한 상황에서 그 금기는 생각보다 쉽게 깨질 수 있다. 스탠퍼드대 스콧 세이건 교수와 다트머스대 벤저민 발렌티노 교수가 2017년 발표한 조사부터가 충격적이었다. 연구진은 미국인들에게 가상의 전쟁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2만 명 미군을 살리기 위해 이란 민간인 10만 명(또는 200만 명)을 핵폭격으로 희생시키겠는가?” 10만 명 사망 조건에서 56%, 200만 명 조건에서도 48%가 “예”라고 답했다. “대통령이 그렇게 결정한다면 지지하겠다”는 비율은 59%로 더 높았다. 특히 공화당 지지층, 60세 이상, 사형제 찬성자가 핵 사용에 우호적이었다.
이 결과를 확장·재현한 결정연구소(Decision Research)의 폴 슬로빅 교수팀은 응징 성향(punitiveness)에 주목했다. 낙태 제한, 총기 자유, 이민자 추방, 사형제 유지 등 ‘처벌 강화’ 정책에 동의할수록 핵폭격 지지도도 선형적으로 높아졌다. 최근 제출된 후속 논문에선 더 놀라운 결론이 나왔다. 구할 미군 숫자를 1,000명, 100명으로 낮춰도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고, 아예 ‘미군 피해’ 조건을 빼도 적잖은 이들이 핵 사용을 택했다. 옵션을 세 가지(비사용·10만 명 폭격·200만 명 폭격)로 늘리면 ‘10만 명’ 선택이 급증하는 ‘미끼 효과(decoy effect)’도 확인됐다.
전통적 통념과 달리 여성 응답자는 남성보다 핵 사용을 더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연구진은 “모성적 보호 본능이 작용한 듯하다”고 해석했다. 또 모든 조건에서 공화당 지지자가 민주당 지지자보다 핵 공격을 더 선호했으나, 선택지 구성에 따라 민주당 내 지지율도 크게 변동했다. 미국 아메리칸대 샤런 와이너 교수는 별도 실험에서, ‘핵 미사용(No launch)’ 선택지를 명시할 경우 핵 공격 지지율이 유의미하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실전 위기에서 보좌진이 제시하는 시나리오가 결정에 치명적 영향을 미친다”며 “대통령에게 반드시 동등한 무게의 ‘비발사’ 옵션을 제시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구진은 “핵 사용 금기(nuclear taboo)에만 의존하는 건 위험하다”고 입을 모았다. 응답은 정치 성향, 감정, 질문 방식에 따라 요동쳤다. 슬로빅 교수는 “핵 버튼을 쥔 이들도 같은 인간”이라며 “결정 구조를 정교하게 설계해 충동과 편향을 최소화하지 않는다면 금기는 언제든 깨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