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파인 = 이상원 기자] SF 영화에서 우주선이 행성 곁을 스치며 가속해 위기를 탈출하는 장면은 클리셰에 가깝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과학계에서는 ‘중력 보조(manuever)’ 또는 ‘그라비티 어시스트’라 부르는 실전 기법이다. 실제로 대다수 심우주 탐사선은 이 기법 없이는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다. 우주선이 행성에 접근하면 행성의 중력이 궤도를 휘어지게 한다. 더 중요한 포인트는 속도다. 행성 역시 태양을 공전하며 고유의 운동에너지를 지닌다. 우주선이 행성의 공전 방향 뒤쪽에서 접근해 근접 통과하면, 행성의 ‘옆으로 달리는’ 속도의 일부를 훔쳐 태양 기준 속도가 증가한다. 반대로 행성 앞쪽을 가로질러 지나면 운동에너지를 반납해 속도가 줄어들며 내행성으로 파고들 수 있다. 행성은 질량이 워낙 커서 우주선이 빼앗는 에너지는 미미하다. 탐사선 수천 대가 지나가도 행성 공전 속도 변화는 측정 불가 수준이다.
로켓은 연료 탑재량과 가속 성능이 비례한다. 그러나 연료 자체가 무겁기 때문에 더 빠르게 가려면 더 많은 연료가 필요하고, 이는 발사 질량을 폭증시킨다. 이를 설명하는 것이 로켓 방정식이다. 중력 보조는 ‘공짜’ 추가 속도를 제공해 연료 한계를 돌파하게 해 준다. 대표적 사례가 토성 탐사선 카시니다. 1997년 발사된 카시니는 지구‧금성 중력 보조 두 차례와 지구 재접근 한 차례로 가속한 뒤 목성을 스윙바이해 최종 목적지인 토성에 2004년 도착했다. 목성 통과 덕분에 수년의 항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수성·금성처럼 태양 가까이 있는 행성 탐사는 반대로 ‘속도를 잃는’ 것이 관건이다. 지구는 태양을 초당 30㎞ 이상으로 공전한다. 이 측면 속도를 줄여야만 태양 쪽으로 떨어질 수 있다. ESA·JAXA 공동 수성 탐사선 베피콜롬보는 2018년 발사 후 지구 한 번, 금성 두 번, 수성 여섯 번의 중력 보조로 단계적으로 속도를 깎아 2026년 수성 궤도 진입을 앞두고 있다. 지구 탈출 자체가 우주 비행의 최대 난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단 성층권을 벗어나면, 우주 공간의 중력이야말로 가장 값싼 연료가 된다. 행성들의 궤도를 계산해 ‘우주 당구’를 설계하는 일은 영화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바로 그 정교한 과학 덕분에 인류는 태양계 구석구석으로 손을 뻗어 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