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파인 = 이상원 기자] 2013년에 존재하던 웹사이트 가운데 약 38%는 지금 인터넷에서 사라졌다.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문서의 절반 정도는 더 이상 열리지 않는 링크를 인용하고 있다. 우리가 의지하던 정보는 여기저기서 조용히 지워지고 있으며, 이런 현상은 디지털 시대에 새로 등장한 일이 아니라, 지질학적 시간 규모로 보면 오히려 ‘당연한 일’에 가깝다.
그런데 물리학의 법칙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론적으로는 정보가 완전히 파괴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한 권의 책이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고 해도, 연기와 재, 열에 담긴 미세한 변화를 모두 분석할 수 있다면 원래 책에 적혀 있던 글자를 복원할 수 있다는 게 양자역학이 말하는 세계다.
양자역학의 ‘유니터리 원리’는 우주가 근본적으로 되돌릴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본다. 지금 이 순간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입자의 상태를 완벽하게 안다면, 이론상 과거를 되감아 볼 수도 있고,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보는 언제나 어딘가에 보존돼 있으며, 진정한 의미의 파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우주에는 이 원리가 흔들리는 듯 보이는 극단적인 공간이 있다. 바로 블랙홀 내부다. 블랙홀 안으로 떨어진 정보가 정말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블랙홀 정보 역설’로 불리는 이 문제는 반세기 동안 물리학자들을 괴롭혀 왔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일부 물리학자들은 해결의 실마리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핵심은 정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회 탈출구를 찾는다는 가능성이다. 다만 이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아직 정립되지 않은 거대 난제, 즉 ‘양자 중력 이론’에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
블랙홀은 정보 보존 법칙을 시험대에 올려놓는 존재다. 그 이유는 블랙홀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故) 스티븐 호킹이 1974년 이론적으로 예측한 ‘호킹 복사’라는 현상 때문에, 블랙홀은 아주 느리게 입자를 방출하며 결국 완전히 증발해 사라지는 운명을 맞는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코넬대 토머스 하트먼 교수는 “블랙홀이 증발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그 안으로 떨어져 들어간 정보는 어디 갔느냐는 문제가 남는다”며 “정보가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는다면 마치 파괴된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사실 사물 자체가 사라지는 일은 물리학에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산도 침식으로 무너지고, 별도 연료를 다 쓰면 폭발하거나 식어 없어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남는 단서다. 보통은 잔해나 화학 조성, 주변에 남은 흔적을 통해 과거를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블랙홀은 다르다. 일정 경계를 넘는 순간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게 가둬버리는, 극단적으로 닫힌 계(系)다. 이 경계가 바로 ‘사건의 지평선’이다.
호킹 복사는 이 경계 바로 바깥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설명돼 왔다. 진공 상태에서도 순간적으로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입자들이 사건의 지평선 주변에서 특수한 과정을 겪으며 방출되고, 이 과정에서 블랙홀이 조금씩 에너지를 잃는다는 설명이다. 물리학자 아흐메드 알므헤리는 이 현상을 “사건의 지평선 근처에서 진공의 에너지가 짜내지는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입자들은 사건의 지평선 밖에서 생겨난 것으로 간주됐기 때문에, 오랫동안 블랙홀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정보는 담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호킹은 블랙홀의 엔트로피를 계산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드러냈다. 엔트로피는 흔히 ‘무질서도’로 번역되지만, 정보 이론에서는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를 나타내는 척도로 이해된다. 양자 정보 연구자인 흐란트 가리비얀은 “정보란 어떤 계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이며, 모르는 부분이 많을수록 엔트로피가 커진다”고 설명한다. 어떤 계를 이루는 모든 입자의 위치와 상태를 완벽히 알 수 있다면 엔트로피는 사실상 0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호킹의 계산에 따르면, 블랙홀이 완전히 증발한 뒤 남는 최종 상태의 엔트로피는 0이 아니다. 다시 말해, 처음에 블랙홀 안에 있었던 정보가 끝까지 보존되지 못한 채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셈이다. 정보 보존을 당연한 전제로 삼는 양자역학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이다.
이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물리학자들은 처음부터 호킹 복사가 정보를 함께 실어 나르는 방식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 왔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산타크루즈 캠퍼스의 에드가르 샤굴리안 교수는 “블랙홀이 완전히 증발하고 나면 남는 것은 호킹 복사뿐”이라며 “결국 정보는 그 안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다만 각각의 입자에 어떻게 정보가 암호화돼 담기는지, 그리고 이런 과정이 양자역학과 중력 이론을 동시에 만족시키면서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인터넷 서버의 수명이 다하고, 옛 웹페이지가 사라지는 모습은 우리에게 정보의 덧없음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블랙홀과 같은 극단적인 우주 환경은 “정보란 무엇이며, 정말로 사라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물리학의 중심 과제로 끌어올리고 있다. 정보의 운명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결국 우주를 지배하는 가장 깊은 법칙에 다가가려는 인간의 또 다른 도전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