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철홍의 걸어서 봄까지]
노꼬메오름

이 오름에 오르면 한라산 능선을 끊김 없이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볼 수 있다. 밀림으로 덮여있는 한라산의 곡선은 바다에서 멈추고, 해저 화산분출로 이어진다.

좌현에서 달이 시속 12.8km로 한라산을 돌고, 한라산이 우현의 해를 시속 1,334km 속도로 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달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하고, 해는 바다로 천천히 떨어지며 전지적 작가 시점의 여행객들에게 서둘러 내려가라고 한다. 저 산은 내게 머물러 있으라 하고, 저 해는 내게 내려가라고 하네.
항구식당

모슬포에 있다. 바람이 세다는 모슬포, 방어가 제철이라고 한다. 제철 방어가 고소하다. 초밥에 싸서 먹는 방어회가 특이한 맛이다. 배에서 밥에 초를 처먹었단다. 언론 노조위원장을 지낸 강 선배가 정의당 대표를 한 이 대표와 옆자리에서 동석했다. 이 대표는 선거에 낙선하고 신장암에 걸렸다고 한다. 치료차 제주에 거주하며 회복을 거의 한 상태라고 한다. 당대표를 지낸 분이 먹고사는 걱정을 해야 한다고 한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 그녀가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건넨 빵이 다음날 우리를 살렸다.
돈네코

친구가 10년 전 제주에 한 달살이를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가 내게 보여줄 게 있다고 제주에 오라고 했다. 딸은 제수를 시작하기로 했다. 눈 내린 한라산, 영실에서 영실기암 윗세오름 남벽 돈네코 길을 걷자고 했다. 나는 딸과 함께 갔다. 이때 본 상고대(樹氷)의 아름다움을 잊기는 어렵다. 누군가에게 그때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첫 장면을 예로 들며 이 겨울 코스를 말한다.
피터, 수전, 에드먼드, 루시 네 형제가 어느 날 오래된 옷장 안으로 들어가다가 ‘나니아’라는 마법 세계에 들어간다. 루시가 옷장 문을 열자 나타난 마법의 세상에는 말하는 동물과 마법 생물들이 살고 있다. 그곳은 하얀 마녀 때문에 항상 겨울이었다. 아이들은 착하고 위대한 사자 아슬란을 만나고, 아슬란을 도와 하얀 마녀와 싸워서 나니아를 다시 자유롭고 평화로운 나라로 만든다.
그 친구는 나의 멘토다. 나보다 한 살이 많은데 그가 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겪은 일들을 나도 겪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좋은 친구다.
남벽

남벽은 안개가 덮고 있다. 안개가 움직인다는 것은 다행이다. 이번 산행의 리더인 임 국장이 남벽 앞에 선다. 안개가 극적으로 북쪽으로 벗어난다. 남벽은 안개에 다시 가리고 몇 장의 사진이 남았다. 감질나게 보여주는 남벽은 수직이다. 허물어지고 있다. 오래된 바위산의 돌무덤이 굴러내려 벽에 분화구를 만들어 놓았다. 저러다 백록담 물이 샐까 걱정이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데 상고대의 주형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목, 구상나무, 철쭉, 키 작은 나무들, 저 나무 위로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고 세상에 없는 마법의 세계가 얼린다. 철쭉을 보니 내년 봄이 그려진다. ‘그렇군! 봄에 온 적이 없군!’
윗세오름

지구가 뜨거웠을 때 화산이 터지고 용암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온도가 만들어 낸 곡선이 오름이다. 높은 곳의 곡선이 몸매를 닮았다. 보름 전 장폐색으로 수술을 한 김 국장이 돈네코 초입만 잠시 맛보다가 내려가려고 했으나, 임 국장이 차 키를 주지 않은 바람에 들어선 길을 바늘 따라가는 실처럼 빠져나가야 했다. 그는 복대를 차고 있었다. 요즘은 로봇 수술을 하고 수술 부위를 본드로 붙인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의 뒤에서 그가 한 발짝을 옮기면 나도 한 발짝을 옮겼다. 어제 노꼬메오름에 오를 때 보니 오늘 코스를 완주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세상일이 어디 뜻대로 된 적이 있던가.
임 국장은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라면을 끓여 먹자고 했다. 임 국장은 김포공항에서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한 가스를 못내 아쉬워했다. 편의점에서 다시 가스를 샀다. 코펠과 가스, 라면 두 개를 지고 그는 앞장을 섰다. 두 시 반쯤에 먼저 대피소에 도착한 그가 비보를 전했다. 대피소에서 취사가 금지란다. 우리는 라면을 빠개서 먹었다. 강 선배가 생라면을 먹으면 속이 쓰리다고 했다. 어려서 생라면을 많이 먹어본 나는 뭔 소리냐고 반문했다. 내려오는 길에 강 선배 말이 맞았다.
영실기암

세 시 이전에 대피소를 모두 내려가야 한다는 안내방송을 뒤로 하고 우리는 영실기암으로 내려간다. 안개가 절벽을 메워 평온하다. 오백나한이 보이고 그 위로 안개 속을 곰 한 마리가 기어오르고 있는 형상이다. 절벽에 앉은 할머니가 외롭고 위태롭다. 안개가 움직인다는 게 다행이다. 기암절벽이 드러나고 단풍이 따라서 나타났다.
지난겨울 동국대 김상일 교수와 함께 온 일이 있다. 석전 박한영, 위당 정인보, 최남선 선생이 서울에서 목포와 진도를 들러 제주에 온 기록이 있어 답사차 따라왔다. 상일이 형은 심장 수술을 한 적이 있다. 영실기암을 오르는 데 힘이 찼다. 등산화를 오래 신지 않았는지 밑창이 떨어졌다.
영실

영실에 먼저 도착한 임 국장이 남의 차를 빌려 타고 내려가 카카오택시를 불러 다시 주차장에 왔다. 김 국장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김 국장이 우려를 떨치고 끝까지 천천히 걸은 건 매우 다행이었다. 강 선배의 배려가 큰 힘이 되었다.
나는 1박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 <서울미래컨퍼런스>에 갔다. 온통 인공지능 이야기다. 동시 통역사가 안 보인다. 통역이 강연자의 말과 시차를 두고 화면에서 위로 올라가고 있다. 심지어 중국어는 한글과 영어 두 개 언어로 통역되고 있다. 남은 일행은 제주에서 산을 봤으니, 바다를 보고 있을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즐거운 여행이었다.

[김철홍 대표]
현) 세음세하태양광발전소 대표
전 KCB대표이사
전 서울신문 ESG위원회 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