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철홍의 걸어서 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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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심죽재(千尋竹齋)

중국 청대 화가 요종보가 민영익이 상하이 망명 시기에 거처로 삼았던 '천심죽재‘를 묘사한 작품이다. 민영익은 도심 한복판 단강리의 집에 <천 길 깊은 대나무 숲속 서재>라는 뜻의 당호를 붙이고 천심죽재를 이상화된 문인 공간으로 구현하고자 여러 화가들에게 그림을 의뢰하였다. 이는 명대 이후 유행한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 의식적인 문화 기획이었다.

요종보는 우거진 대나무숲과 팔작지붕 초당, 책장과 거문고, 소동의 형상을 통해 민영익의 은자 이미지와 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냈다. 하단에 날인된 ’원정안복‘과 ’김용진가진장' 인장은 작품의 소장 계보를 보여준다.

※민영익(1860년~1914년)

▶대미관련 활동
1883년 7월, 푸트 주한 미국 공사의 부임에 답례하기 위해 고종이 파견한 보빙사(報聘使)의 정사 및 전권대신으로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사절단(홍영식, 유길준 등 동행)을 이끌고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미주 대륙을 횡단, 뉴욕에서 체스터 A. 아서 미국 대통령을 예방하며 국서를 전달했습니다.

보스턴 등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철도, 공장, 학교 등 서구 시설을 시찰했으며, 귀국 시 유럽(영국, 프랑스 등)을 거쳐 아시아로 돌아와 총 6개월간의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 경험으로 그는 문화적 충격을 받았는데, 귀국 후 고종에게 "파리가 뉴욕만 못하다"고 답변하며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가 광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왔습니다"라는 소감처럼 조선의 후진성을 절감했다고 전해집니다. 갑신정변 당시 미국인 의사 호러스 뉴턴 알렌의 치료로 목숨을 구한 것도 미국과의 인연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민영익은 이 경험에도 불구하고 친청 사대주의 노선을 고수하며 개화파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중국 관련 활동
민영익은 청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한 친청 온건 개화파로, 외교·망명 활동의 상당 부분이 중국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1883년 권지 협판교섭통상사무로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청나라와의 해관(海關) 사무를 교섭하며 무역·통상 문제를 다뤘습니다. 1886년 조선의 친러 거청(親露拒淸) 정책에 반대해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에게 이를 밀보했으나, 오히려 자신의 입지가 난처해져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습니다.

갑신정변 후에도 톈진에서 이홍장(李鴻章)과 환담하며 흥선대원군 귀국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성립 후 고종 폐위 음모 관련으로 다시 홍콩 망명, 1910년 한일병탄 후 상하이로 이동해 영구 체류했습니다.

상하이에서는 천심죽재에서 중국인 서화가 우창숴(吳昌碩) 등과 교유하며 서화공회(書畫公會), 제금관서화회(題襟館書畵會) 등 단체에서 활동, 묵란·노근묵란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1914년 상하이에서 사망하며, 그의 활동은 청 중심 외교와 망명 생활로 요약됩니다.

민영익은 개화와 사대주의 사이에서 갈등한 인물로, 그의 활동은 조선 말기 국제 관계의 복잡성을 잘 보여줍니다.

김철홍 세음세하태양광발전소 대표
김철홍 세음세하태양광발전소 대표

[김철홍 대표]
현) 세음세하태양광발전소 대표
전 KCB대표이사
전 서울신문 ESG위원회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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