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파인 칼럼=조동범 시인의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 익선동이 하루아침에 변하게 된 그날이 기억난다.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도시화를 거치면서도 100여 년의 세월을 견딘 익선동이 하루아침에 관광지가 되어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적인 장소가 된 그날이 생각난다. 100여 년을 지켜온 한 동네가 무너지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익선동의 소박한 일상을 담은 모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한 편으로 모든 것이 바뀌고 말았다. 방송이 나간 이후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미디어의 집중적인 조명이 이루어졌고 한적한 익선동 골목은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익선동은 서울이 급격하게 변하는 동안에도 옛 모습을 원형에 가깝게 지키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외부와 단절된 섬처럼 남아 지난 100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익선동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놀라운 곳이었다. 익선동이 간직하고 있던 옛 모습은 한옥과 골목 등만이 아니었다. 익선동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형적인 주택가의 정서가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마치 시골 마을의 어느 골목을 연상시킬 정도로 정이 넘치는 곳이었다. 시골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상점이 골목마다 있었고, 저녁이면 골목길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마을 주민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던 곳이 바로 익선동이었다.
그러던 2010년대 중반,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이 전파를 탄 이후 익선동은 슬픈 변화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도시 개발이 어느 한 곳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익선동의 변화는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것이었다. 익선동을 집중적으로 소개한 다큐멘터리 제작진의 선의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결과적으로 익선동은 그 방송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삶의 공간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익선동이 변한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변화의 방법이 문제였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는 경우는 지역 주민들이 받는 충격이 덜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여러 문제가 발생하곤 하는 재개발의 경우에도 미흡하나마 변화에 대한 논의가 먼저 이루어진다. 그런데 익선동처럼 하루아침에 관심을 받게 된 지역은 아무런 대비도 없는 상태에서 감당할 수 없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익선동이 집단 한옥 거주지의 모습을 갖춘 것은 일제강점기 때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익선동 등 북촌 지역은 조선인들의 거주지로, 명동과 충무로 등 청계천 이남 남촌 지역은 일본인들의 거주지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20년대에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이 많아지자, 일본인들은 익선동에 적산 가옥을 짓고 그곳으로 이주하려고 했다. 이에 조선인 건축업자 정세권이 일본인의 북촌 지역 이주를 막고자 익선동 일대 토지를 매입하여 개량 한옥을 지었는데, 이것이 익선동 한옥단지의 시초이다. 그가 익선동에 지은 한옥은 전통 한옥이 아니었지만, 민족적 의지가 투영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정세권은 일제강점기의 부동산 개발업자이자 민족사업가, 독립운동가이다. 익선동과 북촌 등의 지역에 개량 한옥을 지었으며 조선물산장려회와 신간회 등의 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또한 조선물산장려회관을 지어 기증했으며 조선어학회에 재정 지원을 했다. 이러한 활동과 관련하여 고초를 겪는 등 민족적 의지가 남다른 사람이었다. 좁은 필지를 최대한 이용하여 개량 한옥 형태로 지은 익선동 한옥단지는 당시 서민들에게 알맞은 주거지였다.

익선동 한옥단지의 매력 중 하나는 숨어 있는 듯 이어지는 골목이다. 익선동 한옥단지는 지구 단위의 개발이었지만 서민들이 주거할 집을 많이 짓는 것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한옥이 빽빽하게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이유로 인해 단지 곳곳에 골목이 생기게 되었다. 골목을 중심으로 마을 주민들의 왕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면서 시골 마을의 정취가 2000년대까지 이어졌다. 익선동 지역 주민들은 2010년대 중반 개발 붐이 있기 전까지 이런 분위기를 유지하며 삶을 이어왔다. 물론 익선동 지역도 개발을 진행하려던 움직임이 있었다. 지어진 지 100년 가까이 되는 탓에 생활하는 데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복합상업시설로의 재개발을 추진했고 마침내 2004년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도시 정비가 지지부진한 데다가 주민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면서 도시환경정비구역 지정 10년만인 2014년에 주민 스스로 재개발을 포기하게 되었다.
100여 년 가까이 이어온 한옥단지는 이렇게 명맥을 잇게 된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 익선동은 이상하고 낯선 동네일지도 모른다. 종로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개발되지 않고 방치되다시피 한 마을이 있으니 말이다. 도시 한가운데 이런 대규모 한옥 거주지가 남아 있는 곳은 흔치 않다. 이런 사연을 안고 한옥마을로 남게 된 익선동 지역이 레트로 열풍과 맞물리며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2016년 모 방송사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이후, 익선동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을 하게 되었다. 골목마다 관광객들이 넘쳐났고 마을 주민들이 살던 공간은 빠르게 술집과 카페 등으로 대체되었다. 거주하던 주민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장사를 하던 이들 역시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어딘가로 하나둘 떠나게 되었다. 익선동을 이렇게 만든 이들 중에는 외부에서 들어온, 권리금을 노린 전문적인 장사꾼과 지역 재생을 내세운 부동산 투기 업체까지 있었다. 오랜 세월 정붙이고 살던 집을 팔고 떠난 이들도 안타깝지만 더 큰 문제는 세 들어 사는 이들이었다. 집이 낡은 탓에 세가 저렴했던 익선동에 살던 이들은 이사할 곳을 찾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익선동이 이렇게 무너지는 데는 불과 2-3년, 길어야 4-5년이 걸렸을 뿐이다. 100여 년의 세월을 견딘 익선동이 이렇게 변한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해방을 맞이하고, 이후 서울이 화려한 도시로 변화를 거듭할 때에도 익선동은 일제강점기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았다. 2000년 이후에도 변한 것은 없었다. 한옥에는 고단한 이웃들의 삶이 두런거리고 있었고, 골목 한편에 돗자리를 펴고 앉은 주민들이 한가로이 여름밤을 보내는 그런 곳이었다.

익선동이 핫플레이스가 된 데에는 레트로 열풍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옥의 특별함과 골목에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정취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익선동의 한옥은 근사한 전통 한옥이 아니다. 익선동의 한옥은 서민들을 위해 지은 집이며 대체적으로 비좁다. 그 뿐만 아니라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살기에 불편함이 따르는 낡은 집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익선동의 특별한 정취는 사실 고단했던 과거의 삶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그러나 고단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는 오늘의 관점에서, 타자가 되어 바라볼 때 가능한 것이다. 정작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그것은 향수가 될 수 없다. 주민들에게 그곳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자 고단한 몸을 누일 수 있는 안식처일 따름이다. 비좁은 한옥에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런 삶은 결코 구경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최근 레트로 열풍이 불고 있다. 익선동 역시 레트로 열풍으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곳 중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는 레트로가 다른 사람의 삶을 향할 때 빈곤 포르노가 된다는 것을 잊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스스로 타자가 되어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볼 때 문제가 된다. 다른 사람의 낡은 집이나 오래된 동네를, 혹은 고단한 노동의 현장이나 가난한 삶의 정경을 바라보는 것은 폭력이 되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익선동에서 바라본 것이 혹시 그런 것들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시선이 레트로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되어 그들을 삶의 터전에서 쫓아낸 것은 아니었을까?
익선동이 사람들에게 주목받던 초창기 어느 카페가 기억난다. 한옥의 뼈대만 남긴 채 ‘힙’한 공간으로 변신한 그곳에는 더 이상 익선동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낡은 가구와 그릇을 인테리어 삼아 가난을 팔고 있었다. 동네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골목에 밤늦도록 조명을 켜고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은 모습에서는 어떤 배려도 찾기 어려웠다. 익선동에는 100여 년의 세월을 거쳐 온 삶의 흔적이 멈춘 듯 느리게 남아 있었지만, 불과 몇 년 만에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남은 것은 뼈대만 남은 한옥뿐이다. 낡은 한옥에는 더 이상 과거의 삶이 남아 있지 않다. 이제 익선동에 남은 것은 가난한 과거를 인테리어 삼아 커피와 술을 파는 모습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런 모습도 익선동의 모습이고 치열한 삶의 한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이 폭력적으로 쫓겨나야 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슬픈 일이다. -조동범(작가,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 저자)

[조동범]
200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 산문집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 『보통의 식탁』,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인문 교양서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 『팬데믹과 오리엔탈리즘』, 글쓰기 안내서 『부캐와 함께 나만의 에세이 쓰기』,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시창작 이론서 『묘사 진술 감정 수사』, 『묘사』, 『진술』, 문학평론집 『이제 당신의 시를 읽어야 할 시간』,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등이 있다. 청마문학연구상, 김춘수시문학상, 딩아돌하작품상, 미네르바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대학 안팎에서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