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파인=박미주 교수의 세상사는 이야기] 요즘 어디라도 가게 되면 소통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소리들을 자주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들으려는 말보다 하고자 하는 말이 더 많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개인 중심적인 시대에 “우리”보다는 “너와 나”에 최적화 된 사람들의 마인드의 작용이기도 할 것이다.
인근 도시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가까운 행정복지센터에 필요서류가 있어서 서류 발급 신청을 하고 기다리는데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옆 창구에서 조금씩 언성이 높아질락 말락 하는 상황에 자꾸 눈이 갔다.
가만히 들어보니 민원인 입장에서는 “뭐 대단 한 거라고 그렇게까지 까다롭게 하냐” “공무원이 무슨 벼슬인줄 아냐” 창구 직원 입장에서는 “반드시 확인이 되어야 하는 과정이고 신분증이 있어도 지문까지 확인을 해야만 가능하다” 였다.
점점 거칠어지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지켜보게 되는 상황이 발생된 것이다.
아마도 부모님과 관계된 서류가 필요한 모양인데 당연하게 확인하고 발급을 해야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내용이지만 그것은 결과론이었다.
창구에서는 민원인의 필요서류 발급을 위해 부모님과의 가족관계를 증명하는 서류까지도 열람을 했겠지만 민원인이 세세한 상황까지 이해하고 알리 만무하다. 그렇지. “그걸 안다면 이런 소란까지는 안 일어났겠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람간의 말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언품(言品)라는 것이 있다.
그 언품이라는 것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투에서 나오는 최소한의 상대를 존중까지는 아니어도 무시하는 듯한 말투에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누구든 상대에게 존중받지 못하면 속안에서 제어보다 빠른 화가 먼저 불쑥 솟아오르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위의 사례와 같이 창구의 공무원은 민원인과 대화를 하게 된 서류가 본질인 것이고, 민원인의 입장에서는 민원인이 잘 모른다고 해서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말투로 이거저거 확인과정을 거치니 공무원의 무시하는 듯한 말투가 본질이 된 것이다.
그렇듯. 입장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사람 간 대화에 가장 선제되어야 하는 것은 존중의 경청과 바른 발성이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각자의 불쾌한 입장에서만 언성을 높이고 있는 민원 창구에서 결국은 안에서 누군가 관리자가 나와서 민원인을 달래고 사과를 하는 장면을 보면서 발급 서류를 들고 나오는데 최근 읽고 있는 이기주 작가의 “말의 품격”이라는 책이 바로 떠올랐다.
우리가 대화를 하다보면 상대가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것은 분명 이해를 못하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그를 이해시키지 못한 발화자의 책임이 아닐까?
비단, 그것이 관공서의 사례뿐만이 아니라 간혹 음식점이나 상업공간에서도 빈번히 만날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요즘 같은 개인 이기주의적인 사회에 더 필요해지는 “인성교육의 필요성”이 바로 이런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간혹은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고 오해가 빚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누군가와 대화에서 얻어지는 소통의 문제만큼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유형들의 특화된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가 대화 시 최소한의 기본 질서(무시하는 듯한 말투나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귀 기울이는 것)를 지킨다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작은 분쟁에서의 본질을 잃지 않는 말의 품격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박미주 교수(작사가. 김포대 특임교수)]
한국 에니어그램 경영협회 부대표
박미주의 마음연구소 소장
대중가요 작사가
2014년 서울 경제 100인의 CEO 선정
김포대학교 특임교수(태권도융합과)
파주민보, 미디어파인 칼럼리스트 外
[학력사항]
서강대학교 경영학사
중앙대학교 창업 대학원 기후경제학 석사
[저서]
공감세상ㆍ생각으로 피어나다
에니어그램 인생 극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