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초점 없는 눈빛, 비틀거리는 발걸음.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다. 움직이는 시체처럼 보이지만 사자(死者)는 아니다. 부두교 신자들은 좀비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맹독과 접촉한 사람들은 가사 상태에 빠진다. 장례식을 치르고 매장된 사람들을 무덤에서 파헤친다. 다시 그들에게 약을 투여하고, 고문한다. 그렇게 그들은 좀비로 다시 태어난다. 좀비들의 뇌는 약물 중독과 고문으로 피폐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좀비들을 농장에서 노예로 일하게 한다. 그들은 실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미 서류상으로는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중앙아메리카의 농장에서는 이렇게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어 노예로 부렸다.

‘좀비’ 표지와 저자 조이스 캐럴 오츠
‘좀비’ 표지와 저자 조이스 캐럴 오츠

주인공 ‘나’는 서른이 갓 넘은 백인 남성으로 별 특징이 없는 인물이다. ‘나’는 자신을 ‘Q_P_’라고 칭한다. 삼인칭으로 표현된 ‘Q_P_'는 ‘나’의 다른 인격이다. 대학에 다니고 일상을 영위하며, 자신의 범행을 반성하는 척한다. 한마디로 ‘Q_P_’는 ‘정상적’ 인간으로 보이려 애쓴다. ‘Q_P_'는 저명한 교수를 아버지로 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른다. 공감 능력과 동정심,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흑인 소년을 성추행한 혐의로 집행 유예 형을 받는다. ‘법꾸라지’가 되어 더 높은 형량을 빠져나간다. 아버지의 인맥과 범행을 뉘우치는 척하는 ‘Q_P_'의 연기력 덕분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여러 번 사람을 죽인 경력이 있는 연쇄 살인범이다. 흑인 소년의 경우만은 운이 따라 주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욕망에 시달린다. ‘로켓처럼 발기해서 혜성의 꼬리처럼 정액을 분출하는’ 듯한 끈적끈적하고 추악한 욕망이다. 바로 다른 인간을 좀비로 만들어 자신의 성노예로 만들려는 욕구이다. ‘나’는 다른 인간들을 물화(物化)한다. 그들의 인격은 거세되고 살아남는 것은 ‘나’의 욕망뿐이다. ‘나’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눈이란 타인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다. ‘나’에게 타인이란 영혼이 없는 도구이며 욕망을 실현할 수단에 불과하다.

‘내 좀비는 심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좀비는 ‘신이 주인님을 축복하시기를’이라고 말할 것이다.’ 내 좀비는 ‘주인님은 선하십니다. 주인님은 친절하시고 자비로우십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퍼런 내장을 쏟아낼 때까지 마음껏 농락하십시오, 주인님’이라고 말할 것이다. 먹을 것을 애걸하고 숨 쉴 산소를 갈구할 것이다. 언제나 공손할 것이다. (본문 245쪽)

‘나’가 희생양으로 삼은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히치하이커, 부랑자, 쓰레기 같은 부류(비쩍 마르거나 마약 중독자나 에이즈 환자만 아니라면), 시내에서 얼쩡대는 집도 절도 없는 흑인,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인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이다. 백인 중산층, 사회적 유대로 끈끈히 묶인 사람들은 먹이로 삼지 않는다. ‘나’는 사이코패스인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융화되지 못하는 삶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다. 도덕과 윤리, 죄책감을 모르지만 ‘심판’ 받고 싶지는 않다.

‘나’가 좀비를 만드는 방법은 약물 주입이 아니다. 그보다 과학적이지만 엽기적인 방식이다. ‘나’는 독학으로 전두엽 절제 수술 방법을 공부한다. 얼음송곳을 안구 위쪽 뼈 사이로 통과시켜 날 끝으로 전두엽 조직을 파괴하는 방식이다. 책을 통해 독학한 ‘나’의 수술법이 완전할 리 없다. ‘나’는 노숙자, 오갈 데 없는 동성애자, 흑인들을 상대로 ‘좀비 수술’을 시행한다.

그들은 이름을 잃고 ‘토끼 장갑’, ‘건포도 눈’, ‘덩치’로 불린다. 그들은 ‘나’의 원시적 수술을 받고 목숨을 잃는다. ‘나’는 그들의 시체를 처리하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좀비를 만들려는 나의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이번에 ‘나’의 관심을 이끈 상대는 지금까지의 희생자들과는 다르다. 햇빛 속에서 빛나고 자신감이 넘치고 잘생긴 그 아이를 ‘나’는 ‘다람쥐’라고 부른다. 중산층 백인 소년인 그 아이가 사라지면 사회의 이목을 끌 것이 뻔하다.

하지만 나의 욕망은 풍선처럼 부풀어만 간다. ‘흑인도 혼혈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챙기는 아이, 그래서 없어진 걸 알면’ 곧장 경찰이 수사할 아이를 납치할 생각은 ‘나’를 흥분하게 만든다. ‘나’는 전두엽 절제술 대신 좀비를 만들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한다. ‘나’는 오래전 아버지와 방문했던 생물학과 사무실에 들렀다. 토끼와 원숭이 고양이들이 모두 입을 벌리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던 것을 기억해낸다. ‘들리지 않는 소리 없는 비명이 공중에 울려 퍼’진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나’는 성대를 제거하는 방식을 고안한다. 나는 ‘다람쥐’를 납치하지만, 그는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

‘그 눈빛, 머리를 젖히면서 다시 내게 대들다니! 뭉개진 벌레처럼 약한 것이 내게 대들다니. 내 좀비가. 내게 대들다니. 그 순간 나는 자제력을 잃고, 그를 엎드리게 해서 올라타 앉았다. 돼지꼬리 같은 머리를 움켜쥐고 그의 얼굴을 바닥에 쾅쾅 찧었다. 내 성기가 너무 커서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의 창자 속으로 칼처럼 몸을 밀어 넣었다. ‘누 가 네 주인이야? 누가 네 주인이냐고? 누가 네 주인님이냐고?’ (본문 220쪽)

이번에도 ‘나’는 운이 좋았다. 경찰들이 ‘나’를 방문하지만 ‘나’는 변호사에게 연락해 시간을 번다. 그 사이에 증거물을 없애고 옛 희생자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을 버린다. 이번에도 잡히지 않은 ‘나’는 누나와의 식사 자리에 초대된다. ‘다람쥐’와 나의 머리카락을 가죽끈과 붉은 실로 엮어 만든 팔찌를 빙빙 돌리며 그들과 담소한다. ‘나’의 연쇄 살인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놀라운 사실은 소설 속에 묘사된 전두엽 절제술이 실제로 과거에 많은 사람에게 가해진 수술이라는 점이다. 19세기 말부터 1970년대까지 행해진 이 수술은 정신 질환을 앓거나 폭력적인 성격인 사람의 전두엽을 제거하여 다루기 쉽게 만들었다. 1949년에는 이 연구를 발전시킨 과학자들이 노벨의학상과 생리학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 수술에는 수많은 부작용이 따랐다. 수술을 받은 사람들의 사고 능력과 지능이 퇴화했다. 감정을 느끼는 능력마저 사라져 버렸다.

지나치게 예민할 뿐,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들마저 의사의 동의하에 수술대에 눕혀졌다.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다. 케네디 가문의 장녀 로즈메리 케네디는 지적장애 3급이라는 온건한 상태에서 수술을 받고 폐인이 되었다. 정치 명문가인 케네디가 사람들이 정신 장애 딸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술을 받은 로즈메리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이 수술을 받은 환자가 어떻게 존엄성을 잃어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는 또 아버지가 존경하는 교수이자 이미 고인이 된 M_K_박사가 과거에 실행한 실험이 드러난다. 언론은 그 실험을 ‘나치 의사에 비견할 만한’ 만행이라고 밝힌다. 지적 장애아들에게 방사능에 오염된 우유를 먹이고 죄수의 고환을 방사선에 노출 시켰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처럼 소설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만행을 여과 없이 폭로한다. 한 사이코패스가 저지른 범행은 실상 사회가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선천적으로 도덕성과 공감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지만,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노숙자, 흑인, 성매매 여성이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은 강제로 불임 시술을 받았다. 실험실의 동물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듣지 않기 위해 그들의 성대를 제거했다. 사회는 이런 방식으로 그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우리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을 때,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자의 인권을 무시할 때, 우리는 사이코패스와 다름없다. 생각도 감정도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좀비처럼 우리의 인간성은 천천히 말살되어 간다.

저자는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 살인범 제프리 다머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은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범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 듯이 보여준다. 어떤 독자들은 가감 없는 잔혹한 묘사에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저자 조이스 캐럴 오츠는 사이코패스의 머릿속에 가득 찬 광기가 사회에도 만연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무관심과 공익, 사회적 편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우리는 이를 비판 없이 수용함으로써 부두교 신자가 되어간다. 동시에 저자는 타인과의 단절, 자신의 세계만으로의 침잠, 도덕성의 결여가 우리의 정신을 어떻게 황폐화하는지에 대해 얼음송곳 같은 펜 끝을 들이댄다. ‘악몽을 극화하고, 거기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것, 미몽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내가 할 일이다.’ 저자의 말이다.

저자 조이스 캐럴 오츠는 1938년 6월 16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 무렵, 할머니에게 타자기를 선물 받고 작가의 꿈을 키웠다. 시큐러스 대학 재학중에 대학생 단편소설공모전에서 입상했다. 위스콘신대학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디트로이트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문학과 창작을 가르쳤다. 1964년 첫 장편 ‘아찔한 추락’을 펴냈다. 오십 편이 넘는 장편 소설, 시, 산문, 비평, 희곡 등 많은 문학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1967년 오헨리상을, 1970년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1996년 ‘좀비’로 브램 스토커상을 받았다. 2004년부터 영미권의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옮긴이: 공경희, 포레, 2020년(12쇄), 원제:Zombie)

이수정 작가
이수정 작가

[이수정 작가]
1973년산. 이화여대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에서 수학했다.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일러스트레이터와 카투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때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소설 쓰기보다 읽고 분석하고 소개하는 일에 더 재능이 있음을 깨달은 행복한 서평가이자 독서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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