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사람들은 그 시기를 광란의 시대라 불렀다. 1920년대의 미국은 화려하게 반짝였다. 그 아름다움의 토대가 위태롭다는 사실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의 국력은 유럽을 역전했다. 마천루가 들어서고 자동차가 거리를 누볐다. 발목을 드러낸 드레스 차림의 플래퍼들이 재즈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술잔에 넘쳐나는 샴페인 거품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풍요를 상징했다. 그 화려한 시기는 영원히 지속할 듯했다. 1929년 대공황이 샴페인 거품 같은 모든 잉여물을 거두어가기 전까지.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가장 훌륭한 미국 현대 소설 중 하나로 손꼽힌다. 뉴욕의 랜덤하우스 출판사 편집 위원회는 20세기에 영어로 쓰인 가장 위대한 소설을 선정한 바 있다. ‘위대한 개츠비’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1922)에 이어 두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무엇이 이 소설을 위대하게 만들었을까. 소설에 등장하는 개츠비에게 위대하다는 수식이 붙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무슨 짓이건 해치우던 이 청년에게 위대하다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어떤 평론가들의 말처럼 ‘위대한’이란 단순히 반어적인 표현일 뿐일까.
소설의 화자인 ‘나’는 뉴욕에 처음 발 들인 보수적인 청년 닉이다. ‘나’가 뉴욕을 찾아온 이유 역시 20년대 미국의 현실과 맞물려 있다. 증권업을 배워 성공하려는 것이다. ‘나’는 친척인 데이지와 대학 동창인 톰 뷰캐넌 부부와 친분이 있다. 그들은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생활을 즐기는 젊은 부부다. 그러나 톰 뷰캐넌은 데이지를 두고 정부와 바람을 피우는 불성실한 남편이다. 데이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지금 누리는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남편을 떠나지 않는다.
‘나’는 곧 이웃 저택에 사는 개츠비라는 수상한 청년과 친구가 된다. 개츠비는 이상적이고 순수한 인물인 동시에 암흑의 세계에 몸담은 인물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상류 세계를 동경해 왔던 그는 전쟁이 그에게 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가 부를 쌓은 이유는 하나뿐이다. 전쟁 전에 만나 사랑에 빠졌던 데이지와 재회하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 데이지에게 어울리는 재력을 갖추었다. 개츠비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특권을 지닌 자의 시선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오만하게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이 책에 이름을 제공해 준 개츠비만이 내가 이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는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내가 드러내 놓고 경멸해 마지않는 것을 모두 대변하는 개츠비 말이다. …(중략)… 그는 마치 1만 5천킬로미터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지진계와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가능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는 진부한 감수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희망에서의 탁월한 재능이요,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서도 일찍이 발견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그래,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속절없는 슬픔과 가쁜 환희에 흥미를 잃어버린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삼은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들 때문이었다.’ (본문 17쪽)
개츠비가 여는 파티에는 온갖 사람들이 들끓는다. 정작 개츠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개츠비에 관한 추잡한 소문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뿐이다.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그 시절의 많은 뉴요커처럼 속물적이고 부도덕하다. 그들은 도덕이나 예의범절이란 측면에서 개츠비보다 나은 면이 없다. 그러나 그들과 개츠비 사이에는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라는 공고한 유리 천장이 존재한다. 움베르트 에코가 말했듯, 계급 구분이란 아주 잔인한 메커니즘이어서, 졸부는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대대로 물려받은 무산계급의 촌티를 벗어날 수 없다.
우아한 옷차림, 최신 자동차로 무장한 개츠비는 옥스퍼드에서 교육받았다는 뻔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개츠비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나’조차 터무니없는 개츠비의 말에 어이가 없어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을 정도다. 그만큼 개츠비가 늘어놓는 온갖 이야기는 ‘실오라기마저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너무 상투적’인 거짓말이었다. 개츠비가 지닌 허영심이란 그토록 절박한 것이었다.
개츠비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데이지를 향한 그의 순수한 사랑이며 ‘희망에서의 탁월한 재능’이다. 그의 사랑은 어리석을 만큼 맹목적이다. 어쩌면 그가 사랑한 것은 데이지를 사랑하는 그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부두의 맨 끝자락에 있는 ‘단 하나의 초록색 불빛’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첫사랑이며 환상의 산물이다. 개츠비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묻는 철부지이자 사랑이라는 보루에 기대어 선 로맨티시스트이다.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상류층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사랑의 방식을 택한다.
데이지는 개츠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여성일까. 데이지는 아름답고 우아하며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받는 여성이다. 개츠비가 만난 ‘최초의 상류층 여성’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데이지는 그녀의 남편처럼 경박하고 부도덕하며 무기력한 여성이기도 하다. 데이지를 감동시키는 것은 개츠비가 소유한 대저택이며, 그녀를 눈물짓게 하는 것은 개츠비가 지닌 우아한 셔츠들이다. 데이지는 물화(物化)된 사랑 외에는 알지 못한다. 그녀를 둘러싼 물질세계가 데이지가 아는 유일한 세상이다. 데이지에 대한 개츠비의 사랑은 그녀에 대한 몰이해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그 뒤에 일어날 모든 비극의 단초가 된다.
개츠비는 ‘나’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데이지와 재회한다. 데이지 역시 개츠비와 다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데이지는 톰의 곁을 떠날 용기도 의지도 없다. 데이지가 몰던 차가 남편의 정부를 치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개츠비는 그녀를 대신해 죄를 뒤집어쓸 정도로 무모하다. 개츠비의 파티에 왔던 수많은 사람 중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는 단지 두 사람뿐이다. 그것이 뉴욕의 인심이었고, 개츠비가 사람들 사이에서 지닌 지위였다. ‘나’는 데이지가 ‘조문 전보 한 장, 조화 한 바구니 보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노를 느끼지 않고 떠올릴 뿐이다.
‘나는 그곳에 앉아 그 오랜 미지의 세계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개츠비가 데이지의 부두 끝에서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 느꼈을 경이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는 이 푸른 잔디밭을 향해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그의 꿈은 너무 가까이 있어 금방이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을 것이다. 그 꿈이 이미 자신의 뒤쪽에, 공화국의 어두운 벌판이 밤 아래 두루마리처럼 펼쳐져 있는 도시 너머 광막하고 어두운 어떤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본문 262쪽)
개츠비에게 사랑이란 상대의 실체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부질없는 사랑은 개츠비에게 종교나 이데올로기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믿음에, 이상에 개츠비가 지닌 위대함이 있다. 모든 사랑이 위대한 이유는 그 맹목성과 불완전함을 알면서도 뛰어드는 데 있지 않나. 그리고 여기 개츠비라는 부나방이 있었다. 발레리나를 사랑한 비보이, 순수한 사랑을 지켜냈다고 자위하며 죽음을 맞는 조직 폭력배, 그리고 개츠비. 사랑을 위해 조잡하고 비루한 현실을 거부한 사람들. 그들은 위대하다.
F. 스콧 피츠제럴드는 1896년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태어났다. 12세에 세인트폴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부유층이 교육받는 사립학교에서 느낀 열등감이 이후 작품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1913년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했다. 이 시기에 지네브라 킹이라는 상류층 여성을 만나지만, 신분 차이로 인해 헤어지게 된다.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준다. 소설 ‘낙원의 이쪽’의 성공으로 새로운 연인 젤다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지네브라와 젤다는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데이지의 모델이기도 하다. 1925년 세 번째 장편 ‘위대한 개츠비’를 발표했다.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꼽히는 이 소설은 출간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잡지에 단편 소설을 싣거나 영화사에서 극본 작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40년 ‘대군의 사랑’이라는 소설을 집필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수정 작가]
1973년산. 이화여대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에서 수학했다.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일러스트레이터와 카투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때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소설 쓰기보다 읽고 분석하고 소개하는 일에 더 재능이 있음을 깨달은 행복한 서평가이자 독서가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