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후텁지근한 열기가 턱 끝까지 치받친다. 밤을 지배하는 것은 한낮의 뙤약볕만큼이나 강렬한 지열(地熱)이다. 잠깐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잡초와 덤불이 인간의 영토를 공격해 올 것이다. 당신은 이 열사의 땅에서 고립되고 무너지고 절망한다. 1950년대의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에서 제정신으로 지낼 수 있을까. 당신이 이미 문명이 주는 편안함에 너무나 익숙하다면?
소설 ‘풀잎은 노래한다’는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이 쓴 첫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기란 아프리카의 한복판에서 차양 없이 서 있는 경험과 유사하다. 눅진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다. 저자 도리스 레싱은 식민지 로디지아에서 살았던 경험을 통해, 이 묵직한 울림을 던지는 소설을 세상에 선보였다. 주인공 메리는 식민지의 백인 지배층 여성이다. 저자는 건조하고도 냉정한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메리의 몰락을 지켜보게 한다. 저자의 시선에는 어떤 동정이나 감상도 없다.
메리는 식민지에서 태어나 자란 백인 여성이다. 가난한 부모 밑에서 어렵게 성장했지만, 직업 교육을 받는 데 성공한다. 그 결과 도시의 직장 여성으로 독립적으로 살아간다. 몰락의 조짐은 인생을 대하는 철학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노처녀라는 수군거림에 내몰린 메리에게는 자신이 설정한 삶의 잣대가 없다. ‘안락하고 속 편한 독신 여성의 생활’을 등지고 가난한 농장주와 결혼한다. 단 한 번도 문명이 주는 혜택에서 벗어난 적이 없던 그녀는 아프리카의 정글로 뛰어든다.
메리는 농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원주민과 덤불, 무더위란 야만에 속해 있다. 많은 소설에서 남성을 문명, 여성을 자연에 비유하는 것과 달리, 메리는 철저하게 문명을 상징한다. 결혼 전까지 그녀에게 자연이란 추상적인 무엇에 불과했다. 도시의 두툼한 지붕과 냉방시설이 비바람과 더위에서 그녀를 차단했다. 이제 아프리카의 자연은 그녀의 일상에 사정없이 침투한다. 메리는 자연을 지배하는 데에도, 더불어 살아가는 데에도 실패한다.
자연이란 그녀로서는 통제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혼돈의 덩어리를 상징한다. 열기와 습기, 벌레, 냄새, 질병이 그 암흑 속에 있다. 메리는 근대성의 망령처럼 과거를 맴돈다. 위생과 청결, 규제에 집착한다. 그녀는 원주민들에게서 인격을 거세한다. 같은 인간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일이란 애초에 상상할 수조차 없다. ‘사람들이 보든 말든 개의치 않고 유방을 드러낸 채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는’ 원주민 여성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다. 고립된 생활과 무능한 남편은 그녀의 정신을 서서히 붕괴시킨다.
도리스 레싱은 식민지 안의 또 다른 식민지, 곧 이중 억압 구조 속 여성의 존재를 부각한다. 메리는 식민지의 지배 계급이지만, 남성 중심의 식민 질서 안에서는 또 다른 피해자이기도 하다. 리처드가 메리를 대하는 태도는 겉으로는 문제 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메리는 식민지의 가부장 질서 속에서 ‘여성의 역할’로 소비될 뿐이다. 메리는 주체성의 상실을 답습한 백인 여성이다. 어머니의 삶을 대물림함으로써 식민구조를 내면화한다. 어머니와는 달리 그런 삶을 거부할 충분한 삶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노예 모세가 나타남으로써 메리의 정신세계는 혼란을 맞는다. 도리스 레싱이란 거장은 젠더와 인종 문제가 교차하는 지점을 메리와 모세의 관계를 통해 보여준다. 모세는 건장한 육신을 지닌 젊은 남성이며 원주민답지 않은 교양, 독립성, 자존감을 지닌 인물이다. 메리의 억압된 성욕을 자극하며 ‘건전치 못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메리의 이성은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거부한다. 운명의 갈림길을 마주하기를 다시금 회피한 것이다. ‘내면의 줄다리기’는 본능과 제국적 사유 간의 갈등이기도 하다.
그 팽팽한 줄다리기는 또 다른 파국으로 그녀를 몰고 간다. 모세 앞에서 처음으로 메리는 이성을 잃고 눈물을 흘린다. 이 ‘야만적’ 타자와의 감정 교류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모세가 지닌 인간성을 인정하고 그를 동등한 인류로 대하게 된다. 동시에 권위에 대한 체념과 지배-피지배 관계의 전복을 일으킨다. 이제 모세는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식민지 지배자로서의 메리의 역할을 무시하고, 그녀를 돌봐줄 ‘여성’이자 인간으로 대우한다. 더불어 ‘남성’의 권위로 그녀를 통제한다.
그러나 영국에서 이주한 청년 토니의 등장으로 모세와 메리의 관계는 종말을 맡는다. 토니는 진보를 말하는 이상주의자였다. 하지만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묘한 성적 긴장은 그에게는 서구 중산층 규범의 붕괴로 보일 뿐이다. 방황하던 메리는 토니의 권위를 빌어 다시 모세에게 군림하려 든다. 메리의 배신은 모세에게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다른 ‘백인 남성’의 권위를 빌려 그의 인간성을 다시 박탈했고, 모멸감을 견디지 못한 모세는 결국 그녀를 살해한다.
메리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몰락이 아니다. 메리는 식민주의를 상징하며, 모세는 식민 이성이 부정해 온 혼돈이자 생명력 그 자체다. 그들의 싸움은 식민 체제와 원초적 생명의 충돌이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연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 메리와 리처드가 힘들게 일군 농작지가 순식간에 잡초로 뒤덮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세는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침식하는 자연을 형상화한 존재다. 동시에 메리의 무의식 깊숙이 침투한 식민 권력을 반영하는 타자이다.
소설은 백인 지배 계급의 단단한 결속과 동시에 그들 사회 내에서의 분화 역시 보여준다. 리처드는 무능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속한 자연을 사랑하는 농부다. ‘작으나마 자연에게 다시 자연의 것을 돌려주기’를 희망하며, 토지의 생명력을 훼손하지 않으려 한다. 부농인 찰리에게 식민지란 수탈을 위한 대상에 불과하다. 토지란 단지 자본을 증식할 수단을 제공하는 장소이다.
도리스 레싱은 식민지 지배자 역시 식민구조의 피해자임을 역설한다. 메리와 리처드는 지배 계급이지만 끝없는 공허와 피로에 질식된 인물들이다. 찰리는 이미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인간에 대한 공감과 동정 능력을 잃었다. 철저하게 비인간화된 존재인 그에게서 더는 인간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풀잎은 노래한다’는 식민과 피식민지, 자연과 문명,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얽힌 이중 삼중의 억압 구조를 파헤치는 소설이다. 소설의 제목은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의 한 구절에서 가져왔다.
산속의 이 황폐한 계곡
희미한 달빛에 싸여 예배당 주변의
나자빠진 무덤들 위에 풀잎은 노래한다 (the grass is singing)
나자빠진 무덤들은 실패한 식민의 흔적이며 붕괴한 문명이 남긴 잔해다. 낯설고 원시적인 리듬과 곡조가 무덤을 덮는다. 풀잎은 언제나 그 위에서 무심하게 노래할 것이다.

[이수정 작가]
이화여대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서 수학했습니다.
서평가이자 영화 칼럼니스트로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깊은 사유와 날카로운 통찰을 갖춘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