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집 ‘레이디스’를 읽는 독자들은 기이한 감정과 마주한다. 그 감정은 두려움과 불안, 수치심이 뒤엉킨 채, 이상하게 낯익다. 우리는 일상에서 한 번쯤 이런 감정과 마주한 적이 있다. ‘레이디스’에는 피가 튀는 장면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곧 자신이 느낀 감정이 어디에 기인하는지를 알아차린다. 우리가 느끼는 진짜 공포는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늘 사소하고 익숙한 일상 속에서 불쑥 고개를 든다. 그렇다. 진정한 공포란 거대한 사건 사고보다는 늘 사소하고 미시적인 일에서 비롯된다. 그 대상은 우연히 마주친 이웃일 수도 있고 새로 들어온 보모일 수도 있다. 혹은 애완동물로 기르기 시작한 달팽이 떼일 수도 있다. 우리와 가장 친밀해야 할 배우자 역시 완전히 믿을 수 없기란 매한가지다.

저자가 보여주는 복합적인 감정과의 만남은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삶을 영원히 바꿀 수도 있는 계기가 된다. 책의 제목인 ‘레이디스’가 알려주듯, 소설의 주인공은 대개 여성이다. 그들은 독립적이고 때로는 무기력하며, 속물스럽거나 위험하다. 그들은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 애쓴다. 그러나 그들은 비참하게 무너지거나 불가해한 세상사에서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린다. 혹은 용감하게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저자가 설정한 세상은 우리 삶과 너무나 닮지 않았는가.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은 어린 남자아이를 여자아이로 길러내는 수녀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남성을 혐오하지만, 메리라는 이름을 붙여준 그 남자아이에게는 푹 빠진다. 어느 종족에 대한 추상적인 혐오감은 구체적인 인간 앞에서는 무너져 내리고 만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진실은 숨길 수 없다. 메리는 곧 모든 사실을 파악하고 수녀원을 빠져나간다. 수녀원을 빠져나간 메리는 과연 수녀원을 폭파했을까? 저자는 진실을 억누르려는 공동체의 위선을, 폭소와 함께 조롱한다.
‘미지의 보물’은 주인 없이 기차역에 놓인 가방을 차지하려는 두 남성의 옥신각신을 보여준다. 가방에는 대체 뭐가 들어있을까? 한밤에 벌이는 그들의 추격전은 마치 첩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마침내 주인공이 가방을 열었을 때, 독자들은 허탈감을 느낀다. 실망한 주인공은 곧 그 물건이 ‘진짜 보물’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남들에게는 하찮은 물건일지 몰라도 그에게만큼은 ‘짙은 파랑, 연보라, 초록색, 실눈을 뜨고 이 색채의 모둠’을 바라볼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인 것이다.
‘최고로 멋진 아침’에서 주인공 애런은 험난한 뉴욕 생활에 지쳐 교외의 마을을 찾는다. 그는 전원생활이 주는 아름다움에 만족한다. 그는 하숙집을 구해 오랜만에 휴식을 취한다. 그에게 이 낯선 마을은 이미 고향과도 같았다. 그는 신비한 소녀 프레야와 친구가 된다. 그러나 성인 남성과 이제 막 10대에 들어선 소녀의 우정을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그는 곧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심하게 된다. 지상낙원은 없었다. 전원의 평화란, 애초에 그의 망상 위에 세워진 허상이었다. 그는 집단의 폭력에 무력하게 당하고 만다.
뼈아픈 건 어차피 거의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절감이었다. 떠나는 행위 바로 그 자체에 내포된 파멸의 감각이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마을이 허물어져 내렸다. -본문 85쪽
마을은 애초에 잔혹하고 무관심한 곳이었다. 그곳에 아름다움을 덧칠한 이는 애런, 그 자신이었다. 이제 그가 마을에서 느꼈던 ‘최고로 멋진 아침’들은 사라져 갔다. ‘반백의 노인, 교회와 찬송가, 철로, 프레야, 칼공장, 장미 덤불의 꽃봉오리, 영원한 가능성과 영원한 무의 아침들’이 말이다.
‘모빌 항구에 배들이 들어오면’은 학대받는 아내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주인공 재럴딘의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여 보여준다. 재럴딘은 지독한 폭력을 가하는 남편을 클로로포름으로 마취해 죽인다. 남편을 없앤 그녀는 신이 나서 마을을 빠져나간다. 버스에 오른 그녀의 기억은 과거로 향한다. 한때 매력적인 독신 여성 재럴딘은 아파트에서 친구와 지내며 모빌 항구에 들어오는 군인들과 데이트하던 시절을 상기한다. 재럴딘은 예쁘고 육감적이었기에 모든 군인에게 인기를 누렸다.
그녀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우연히 애인과 지냈던 호텔에 감금되어 강제로 성매매를 하게끔 된다. 한때 그녀를 설레게 했던 군인들은 이제 그녀를 강간하는 대상이 된다. 그때 재럴딘을 그곳에서 구해주고 결혼한 이가 남편 클라크였다. 그러나 어제의 ‘은인’은 이제 그녀를 ‘창녀’ 취급하며 괴롭힌다. 마침내 경찰들이 재랄딘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살인죄’로 처벌받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을 맞이했음을 알아차리고 비명을 지른다. 그녀의 비명은 감옥이 아닌 또 다른 지옥을 향해 터져 나왔다.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은 어린 소녀 엘리의 뉴욕 입성기이다. 어린 시절은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하다. 처음 맞이하는 감정은 서너 배로 증폭되어 영혼에 생채기를 낸다. 엘리처럼 예민한 아이들은 작은 일에도 상처받고, 작은 일에도 무너진다. 어른들은 자신의 과거를 잊고 그들을 세상 밖으로 나가도록 부추긴다. 엘리는 낯선 뉴욕이 두렵기만 하다. 그녀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도 자신과 비슷한 감각을 예리하게 읽어낸다. 그녀의 불안은 커져만 간다. 엘리는 길 건너에서 공을 튕기며 노는 어린 여자애를 발견한다. 그녀의 공 튕기는 솜씨에 엘리는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엘리에게 내려가서 그 아이와 말을 나누고 친구가 되라고 권한다. 엘리는 단지 어머니를 만족시키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다.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에게 말을 걸고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그러나 낯선 소녀는 엘리를 무시한다.
“나는 엘스퍼스 레버링이야.” 엘스퍼스는 쥐어짜내듯 말했다. 이름이 여리고 발가벗겨진 무언가처럼 공중에 걸렸다. 마치 자기 자신 같았다. -본문 139쪽
그 뒤에 엘리는 세상의 적의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알게 된다. 야비함은 어른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엘리는 과연 무사히 뉴욕에 안착할 수 있을까.
‘돌고 도는 세상의 고요한 지점’은 다른 여성의 외도를 우연히 발견한 중산층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로버트슨 부인은 어느 날 우연히 새로운 공원에 아들과 놀러 간다. 로버트슨 부인은 그 공원이 매우 아름답고 고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웃한 동네가 지저분해서 자신이 사는 동네와는 다르다는 사실만이 불만이다. 로버트슨 부인은 옆 벤치에 앉은 금발의 젊은 여성도 아이를 데리고 놀러 나왔음을 알아차린다. 로버트슨 부인은 몇 번의 눈길만으로도 그들 모자가 자신보다 사회적 계급이 낮음을 알게 된다. 낯선 남성의 출현으로 로버트슨 부인은 긴장한다. 곧 그녀는 옆 벤치에 앉은 여성이 그 남성과 사귀는 사이라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들의 사랑은 조용하고 순수하며 아름답다. 그러나 로버트슨 부인은 그들 관계에 ‘불순함’을 부여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낀다.
찰나에 스치는 눈길이었지만 그 속에서 한 여자가 깊이 사랑받는 다른 여자에게 던지는 태고의, 그 불멸의 시선을 보았다. 욕망, 선망, 애틋한 그리움, 질투와 대리 쾌감이 뒤섞여 이루어진 그 눈길이 한순간 베일을 벗었다가 다시 베일 속에 가려졌다. -본문 168
‘레이디스’에는 여기 소개한 작품들을 포함해 매혹적이고 가슴 뛰게 하는 단편 소설 16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집은 심리소설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하이스미스의 초기 소설 을 수록한 작가 탄생 100주년 기념 소설집이다. 영화화된 ‘캐롤’이나 ‘재능 있는 리플리’ 등으로 유명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단편 소설에서도 그녀만의 강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레이디스’ 속 여성들은 때로는 피해자고, 때로는 방관자며, 때로는 서늘한 복수를 감행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불안은 낯설지 않다. 하이스미스는 어쩌면 우리가 평소 외면해 온 감정들—어렴풋한 불쾌감, 모멸감, 그리고 일상의 균열을—잔혹하리만치 정확하게 짚어낸다. 그것이 이 단편집의 진짜 공포이자 진짜 매혹이다.

[이수정 작가]
이화여대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서 수학했습니다.
서평가이자 영화 칼럼니스트로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깊은 사유와 날카로운 통찰을 갖춘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