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2025년에 다시 읽는 손택
1970년대에 쓰인 수잔 손택의 ‘여자에 관하여(윌북, 2025)’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강력하고 유효한 텍스트로 남아 있다. 이 책이 페미니즘 이론의 고전이라서가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과 '진영 윤리'가 예술의 평가 기준이 되어버린 지금, 손택은 이미 반세기 전 그 함정을 꿰뚫어 보았다. 이 글은 ‘여자에 관하여’ 전체를 조망하기보다, 그의 사유를 가장 치열하게 보여주는 ‘페미니즘과 파시즘’을 둘러싼 논쟁을 다루고자 한다.

손택은 예술이 도덕의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을 경계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텍스트'는 좋은 예술을 담보하지 못한다. 예술의 자율성을 훼손하고, 사유의 복잡성을 단순한 명제로 환원할 뿐이다. 이것이 손택이 여성, 미학, 권력의 문제를 하나의 논리로 단순화하는 것을 거부했던 이유다. 손택은 페미니즘 운동의 일원으로서 자신을 정의하기보다, 담론 자체의 구조에 대해 질문하는 지식인으로 남기 원했다. ‘여자에 관하여’는 미학에 관한 손택의 사유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 보여준다. 손택의 글에는 고정된 이념도 명쾌한 답변도 없다. '복잡함 속에서도 생각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매혹적인 파시즘 — 미학과 권력의 결탁
손택이 제시한 '매혹적인 파시즘'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오해되고 있다. 파시즘의 매혹에 관한 연구는 단순히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손택이 주목한 지점은 여기에 있다. 권력이 어떻게 시각적 형식과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장악하는가. 손택은 나치 영화 제작자 레니 리펜슈탈의 영상 언어를 면밀히 분석했다. 리펜슈탈이 보여준 영상미는 뛰어났다.
영상 속 신체들은 ‘아리아인’의 완벽한 균형과 조형미를 구현했고, 조명은 적재적소에 쓰였으며, 음악은 관객의 심장을 울렸다. 손택이 포착한 지점은 이 미학적 성취가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세하는 도구로 작동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름다움은 절제로, 질서는 복종으로, 통일된 행동은 숭고함으로 제시되었다. 손택은 파시즘 안에서 재현되는 마조새디즘적 성향에서 에로스적 충동을 발견했다.
이처럼 파시즘은 논리적 설득을 통해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각을 통해 작동한다. 관객이 저항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영상의 아름다움과 거대한 스펙터클이 인간의 의식을 압도한다. 인간은 스스로 그 이미지에 매혹되어, 권력 질서 속에 자발적으로 흡수된다. 파시즘의 내면화는 그렇게 이루어진다. 손택이 간파한 파시즘이 지닌 진정한 위험성이다. 파시즘의 미학은 특정 시대나 특정 이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를 바꿔가며, 형태를 달리하며 계속해서 나타난다. 아름다움과 권력의 결탁은 좌파 운동, 상업 광고, 심지어 인권 운동에서도 발견된다. 손택이 이를 강조한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람들은 대개 '나쁜 이데올로기‘만 경계하고, ‘우리 편’의 미학이 드러내는 이데올로기에 관해서는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과 파시즘 — 리치와 손택의 논쟁
손택의 사유를 가장 치열했게 보여주는 지점은 바로 미국의 저명한 페미니스트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와의 논쟁이다. 이 논쟁은 단순한 학문적 대립이 아니다. 페미니즘 운동 자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근본 질문이다. 리치는 손택의 정치적 입장이 모호하다며 비판했다. 여성 해방은 명확한 정치적 입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리치는 여성을 억압하는 부조리한 구조 앞에서, 지식인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진영을 거부하는 것, 중립을 지키려는 태도는 기존 권력 구조에 편승할 뿐이라고 밝혔다.
손택의 입장은 달랐다. 손택은 진영적 단순화가 사유의 복잡성을 거세한다고 보았다. 그렇다, 여성은 억압받고 있다. 그러나 억압의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것이 미학과 감각, 욕망과 권력의 층위에서 어떻게 얽혀 있는지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같은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편들기‘가 아니라, 사고의 자유를 지키는 일이었다. 손택은 여성 혐오적인 예술 작품과 여성을 억압하는 미학 역시 분석했다. 그런 작품과 담론을 분석하는 행위는 그것이 지닌 미학에 찬성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정치적 올바름과 미학적 성취 — 오래된 논쟁의 현재형
손택의 문제의식은 '정치적 올바름'의 시대에 더욱 선명하고 절실하다. 예술을 평가하는 기준은 점점 도덕화되고 엄숙해진다. '진보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만 사용해야 한다는 규범이 예술 창작의 전제 조건이 되어가고 있다. 손택에게 미학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완결성의 문제였다.
한 편의 영상이 미학적 성취를 획득했다는 것은, 그 영상의 형식과 내용이 정확하게 호응한다는 뜻이다. 그 영상이 담보하는 주제 의식이 어떠하건, 미학적 평가와는 별개의 문제다. 손택이 레니 리펜슈탈을 분석했을 때, 그 영상이 지닌 미학적 가치를 인정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나치의 미학을 칭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파시즘의 위험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리펜슈탈의 작품이 지닌 미학적 힘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손택은 이렇게 썼다.
"리펜슈탈의 영화가 프로파간다와 구분되는 다큐멘터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다. ‘의지의 승리’에서 기록(영상)은 현실의 기록일 뿐 아니라 현실을 구성한 원인이며, 결국에는 현실을 대체한다"-138쪽
이 문장에 예술이 갖춰야 할 윤리에 관한 손택의 사유가 응집되어 있다. 손택은 리펜슈탈이 복권될 수 없는 이유 역시 명확히 밝힌다. 시대가 한참 흐른 뒤, 리펜슈탈이 낸 새로운 사진집에도 '파시즘적 미학'은 여전히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 작품에서 미학적 완결성과 그 작품이 보여주는 세계관을 분리할 수는 없다. 그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선택 역시 우리의 몫이 아닌가.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리펜슈탈의 영화를 거부할 수 있다.
진영을 넘어선 사유의 윤리
결국 손택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손택은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책임함이나 냉소주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사유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윤리적 선택이었다. 그것은 무관심의 거리가 아니라, 비판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거리였다. 손택은 어떤 현상도 정치적으로 단순하게 재단하지 않는다.
리펜슈탈의 다큐멘터리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대립 역시 손택이 사랑한 '분파주의'의 한 사례다. 역사적 맥락과 사안의 복잡성을 거세한 해석은 명징하고 '도덕적'일지는 모르지만,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틀 역시 협소하게 만든다. 페미니즘을 포함한 모든 '이즘'이 도그마가 되고, 이론과 실천이 균형을 잃을 때, 정치적 노선이 지적 사유를 앞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재고해야 하는 건 페미니즘 비평의 적절성이 아니라 수준이에요. 페미니즘은 윤리적 연대의 명목으로 지적 단순함을 요구합니다."-188쪽
손택의 통찰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2025년, 한국에 사는 우리는 ‘예술의 도덕화’라는 새로운 파시즘과 싸우고 있다. 손택의 사유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술과 지성의 윤리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수정 작가]
이화여대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서 수학했습니다.
서평가이자 영화 칼럼니스트로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깊은 사유와 날카로운 통찰을 갖춘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