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잘생기고 부유하며 능력까지 갖춘 남자, 그리고 그를 외면하는 당찬 여자. 이들이 서로를 알아가며 오해와 편견을 허물고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의 원형이다. 그 시작점에는 제인 오스틴의 걸작 『오만과 편견』(1813)이 있다. 200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 드라마, 소설 속 연애담 곳곳에서 이 작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는 이 소설의 현대적 변주다. 레이스 달린 드레스와 마차 바퀴 소리가 울리던 무도회의 밤, 계급과 예절이 숨결처럼 스며든 시대에 태어난 이야기이다.

결혼이라는 생존 전략
‘오만과 편견’의 배경인 19세기 초 영국에서 장자 상속제는 젠트리 계급(영국의 하급 귀족)의 딸과 차남을 결혼 시장으로 내몰았다. 여성에게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었다. 사촌 콜린스와 결혼하면 집안을 지킬 수 있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존경할 수 없는 상대라며 단칼에 거절한다. 그녀에게 결혼은 현실과 타협한 계약이 아니라, 마음과 이성이 함께 끌리는 선택이어야 했다.
반면 친구 샬럿은 현실적 이유로 콜린스와 결혼한다. 그녀는 사랑이 없더라도 안정된 생활을 택했고, 엘리자베스는 그 선택을 비난하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오스틴은 한 여성의 독립성과 또 다른 여성의 생존 본능을 나란히 보여주며, 그 사이에 도덕적 우열을 두지 않는다.
오만한 남자와 편견 가득한 여자
엘리자베스 베넷은 교양 있고 주체적인 젠트리 출신 아가씨다. 귀족 신분의 부유한 다아시를 처음 만나지만, 그의 거만한 태도와 무심한 말투에 즉시 반감을 품는다. 반면 사교적이고 매너 좋은 장교 위컴에게는 호감을 느낀다. 위컴이 다아시를 험담하자 그녀의 편견은 더욱 굳어진다. 하지만 다아시는 반성하고 변화할 줄 아는 남자였다. 엘리자베스와의 관계를 통해 타인의 감정 역시 존중할 수 있게끔 성장했다. 그리고 그의 훌륭한 인품을 가린 오만한 성격을 고쳐나간다. 점차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의 진면목에 눈 뜬다.
엘리자베스는 스스로가 사람의 본성을 꿰뚫어 본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정작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이는 자신이었다. 오만이 다아시의 약점이라면, 엘리자베스의 약점은 편견이다.
또 엘리자베스는 위컴이 겉모습과 달리 바람둥이에다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엘리자베스의 여동생 리디아가 위컴과 함께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다아시의 도움으로 그들의 도피는 결혼으로 이어지고 엘리자베스의 집안에 평화가 찾아든다. 다아시의 두 번째 청혼을 엘리자베스가 기꺼이 받아들였음은 물론이다.
2인치 상아 위의 정밀한 관찰
소설은 숨 막히는 스토리 전개로 독자를 긴장하게 한다. 맏딸 제인이 다아시의 친구 빙리와 연결되는 서브플롯 역시 흥미를 더한다. 제인 오스틴은 자신의 소설 쓰기를 ‘섬세한 붓으로 2인치의 상아에 작업하는 일’이라 규정한 바 있다. 저자의 심리 묘사는 그토록 치밀하고, 문장은 유려하다. 사교계 인간군상을 오랫동안 관찰해 오며 그들의 위선과 무례함을 목격한 덕분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언뜻 뻔한 로맨스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스틴의 손끝에서 빚어진 이 이야기는, 단순한 연애담을 넘어 인간 심리와 사회 구조를 꿰뚫는 정밀한 기록이 된다. 소설은 인간 심리에 대한 저자의 깊은 통찰과 당대 영국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질투, 수치심, 오만, 허영과 같은 인간 본연의 감정을 섬세하고도 풍자가 넘치는 필치로 써 내려갈 뿐이다.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제인 오스틴이 구사하는 재현의 기술은 셰익스피어에 비견할 만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미 200여 년 전에 쓰인 이 소설은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공감받는다. 우리는 사랑이 단지 낭만적인 무엇이 아니라는 뼈아픈 사실을 안다. 사랑에서 결혼까지 이르는 길에는 갖은 현실적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 200여 년 전에도 사람들은 같은 계층과 유사한 아비투스를 지닌 이들과 결혼했다.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 결합하기 시작한 제인 오스틴의 시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사랑의 부산물인 자존심과 오해, 편견이 연인들 사이에 끼어든다.
제인 오스틴의 이루지 못한 꿈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제인 오스틴의 분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인 오스틴은 엘리자베스처럼 젠트리 출신이었다. 두 사람 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아름답다는 공통점 역시 있다. 그러나 결혼으로 신분 상승한 엘리자베스와 달리 제인 오스틴에게는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오만과 편견의 원작 ‘첫인상’을 쓰기 일 년 전, 제인 오스틴은 신분 차이 때문에 청혼 직전까지 간 관계가 무산된 경험이 있다. 남자 쪽 집안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 아픈 경험을 소설에서는 해피 엔딩으로 전환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이 소설은 실연으로 고통받은 제인 오스틴의 바람을 그린 소설일지도 모른다.
제인 오스틴은 그 뒤에도 ‘이성과 감성’, ‘에마’, ‘수전’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소설에서 제인 오스틴은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고찰하고, 사회의 악습을 비판한다. 제인 오스틴은 그 뒤에도 한 번 결혼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성의 청혼을 수락했다가 하루 만에 번복하고 만다. 재산이 많은 남성이지만 매력이나 사랑을 느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 또한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 엘리자베스와 비슷한 면모다. 결국 상속에서 제외되어 궁핍하게 살아가던 제인 오스틴은 소설이 빛을 볼 무렵, 병에 걸려 41세의 나이에 사망한다.
200년을 건너온 사랑의 지혜
올해는 제인 오스틴이 태어난 지 250년 되는 해이다. 출판계는 제인 오스틴 전집의 특별 에디션을 내놓았고 제인 오스틴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그녀를 기념하는 많은 문화 행사에 참여 중이다. 2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은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사랑과 연애에 대해 조언하기를 아끼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은 여전히 그녀의 작품 속에 살아남아, 연인들에게 속삭인다. 상대를 오해로 이끄는 오만과, 상대를 겉으로만 평가하는 편견을 버리라고. 오만과 편견은 여전히 우리 곁에 거울처럼 서 있다. 사랑을 비추되, 그 안에 비치는 우리의 자존심과 선입견까지 드러내는 거울 말이다.

[이수정 작가]
이화여대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서 수학했습니다.
서평가이자 영화 칼럼니스트로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깊은 사유와 날카로운 통찰을 갖춘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