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참여의 사회적 기능 [박미주 교수 칼럼]
필요한 참여의 사회적 기능 [박미주 교수 칼럼]

[미디어파인=박미주 교수의 세상사는 이야기] 추석 명절 기간 도로마다 인사를 가장한 홍보 현수막들이 시야를 방해할 만큼 나부끼고 읽고 지나가도 기억되는 이름들은 일부일 뿐... 그나마 그 일부의 사람들도 기억되는 사건과 연결이 되거나 사적 관계로 인한 기억의 실마리가 있어서인지 딱히 그분이 지역에 기여한 성과로 연결이 되는 기억은 없다.

김홍신 전 국회의원이 말했던 의원들의 명절 떡값도 생각나고, 냉정하게 말하려 들면 참 많겠지만 사람들은 사적 관계를 생각해 말을 아끼거나 또는 불이익을 우려한 사회적 관계를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무는 경우가 다반사일 것이다.

그렇게 현수막을 도로에 담벼락치듯 거신 분들마저도 지역의 환경 활동이나 국제적 기후 관련의 활동에서는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들에 대한 참여를 독려하는 발언들을 한 것이다.

심지어 명절 도로 사거리에 모퉁이마다 같은 현수막이 걸린 모습을 보면서 안에서 울컥거리는 화를 조금은 누르는 인내가 필요했다.

이럴 때 왜 참아야 하는지? 왜 불이익을 떠올려야 하는지 우리는 함께 생각해야 한다.

소란스럽기 그지없던 계엄, 탄핵, 선거에 이르러 정권이 바뀌고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도 전투적인 모습들을 보였던가?’ 한 번쯤은 되돌아보아야 한다.

지난 6개월여를 그리도 요란스러운 과정을 지나 정권이 바뀌기까지 했지만, 여전히 소란스럽고, 여전히 경기는 어렵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아직, 얼마나 됐다고’라는 말을 할 것이다.

전 국민을 놀라게 했던 비상계엄으로 탄핵이라는 엄청난 과정을 거쳐 정권이 바뀌었다면 이젠 보통 사람들은 생업의 현장에서 자신들의 정서 주소를 잘 찾아가 살아가도록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서로 겨누었던 감정의 총을 거두고 ‘협치’라는 실행형의 정서적 사회로 가는 것이다.

아직도 사람들은 그때의 그 정서에 머물러 뭔가 영웅심리와 분노의 테두리 안에서 서로 감정을 겨누고 있는 모습들이 지역 사회에서는 고스란히 나타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보고 싶은 뉴스만으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괜한 자신들의 정치적 소신에 핏대를 올리며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모난 성격을 보이고는 한다.

세상 어리석은 행동 아닌가 싶다. 그냥 그대로 존중하면 되는 것을... 이럴 때 우리가 보여야 하는 존중의 인정보다는 무시의 존중을 해 버리면 그만인 것을 말이다.

혹여,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면 모르겠지만 근거도 제시하지 못할 우김으로 자신의 소신과 맞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정체성 없는 소신으로 상대에게 평가를 받으면서 관계에 영향을 미칠 필요는 없다.

이제 우리는 성숙해져야 한다.

한 번 믿기 시작하면 그걸 강화하는 근거만 골라보게 되고, 결국 자기 생각이 ‘사실’로 굳어지게 되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믿는 편향된 언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욕망을 강화 해주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그에 반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경향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적인 단순히 고집이 세다는 문제를 넘어선 현실을 선택적으로 편집해 받아들이는 왜곡된 인지에 머물러 보여지는 건강하지 않은 신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투명함을 갖기 위해 정확하게 알고 발언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받아들일 것은 인정하고 사회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사회적 기능인 ‘건강한 참여‘를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가 정서적인 감정을 쏟아내었던 시간에 대한 결과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박미주 교수(작사가. 김포대 특임교수)
박미주 교수(작사가. 김포대 특임교수)

[박미주 교수(작사가. 김포대 특임교수)]
한국 에니어그램 경영협회 부대표
박미주의 마음연구소 소장
대중가요 작사가
2014년 서울 경제 100인의 CEO 선정
김포대학교 특임교수(태권도융합과)
파주민보, 미디어파인 칼럼리스트 外

[학력사항]
서강대학교 경영학사
중앙대학교 창업 대학원 기후경제학 석사

[저서]
공감세상ㆍ생각으로 피어나다
에니어그램 인생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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