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遠來)’라는 기준의 틀
‘원래(遠來)’라는 기준의 틀

[미디어파인=박미주 교수의 세상사는 이야기]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고 지자체의 공공 행사를 담당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따른 각자가 갖는 고유의 기준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의 대화의 특징에서 볼 수 있는 대화법 중 상대가 다른 의견을 제시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제안 시 ‘원래(遠來)’라는 기준을 들이대 안전이 보장된 관습을 선택,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지역의 자치단체뿐만 아니라 특정 단체의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들은 그동안 봐 왔거나 경험해 온 인습의 관행이 되어 때로는 '전통'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기준을 만들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어떤 경우에는 손해를 끼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래(遠來)’라는 말을 사용할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 보자.

상대방에게 자신의 말이나 입장을 합리화 하거나 강하게 주장 할 때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 또는 “원래 다 그런다”는 등의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원래’라는 게 어디 있는가?

어쩌면 그 ‘원래’라는 틀은 그동안 해오던 방법을 바꾸고 싶지 않은데 바꾸려면 번거로워질 때, 상대방의 제안이나 의견의 거절을 그렇게 돌려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사람들의 이기적인 성향들도 점점 심화되는 사회에 원천적으로 바뀌는 과정 없이 무슨 일이든 처리하려는 관행의 습관처럼 쉽게 살아가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는 것처럼 사람들도 그동안 변화 없이 똑같은 식상하기만 한 '관행(慣行)'을 좋게만 받아들일 리는 없다. 사람들은 변화를 요구하고 또 새로운 다양한 마주침을 요구한다.

다만, 일을 진행하는 담당자들만이 편안하게 안전이 보장되는 관행을 따르고 싶어 할 뿐인 것을 마치 ‘원래’라는 잣대를 당연하게 규정처럼 하고자 하는 것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점점 심해지는 비교의 경쟁 바다에서 ‘평가’라는 과정을 향해 있는 사람들의 '관행(慣行)'은 그저 새로운 시도가 아닌 눈에 보여지는 내적 영향보다는 가시적인 평가에 기준 되어 있는 그들만의 심적 부담일 뿐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심적 부담을 ‘원래’라는 ‘관행’의 틀에 안전할 것이다 라는 추상적인 결과에 안일하게 맡겨버릴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용감해져야 한다. 그 '관행의 틀' 안에 갇힌 '안전할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미지의 안전에 대해 새로운 시도와 차별화된 선택을 하는 것에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볼 때마다 달라진 것 없는 식상한 그대로를 ‘원래’라는 틀에 넣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면...

그리고 그 관행에 따른 변화 없는 일반적인 내용으로 많은 이들에게 참여의 기회를 목적했다면 '잘 됐다'는 말로만 듣는 가식적인 칭찬에 갇힌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건강한 경청으로 새로운 제안에 귀와 마음을 열고 새로움을 맞이할 열린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유독 '원래'라는 기준에 갇혀서 대화하는 사람들의 주변을 보면 과연 다수에게 이해를 받을만한 상식적인 기준의 단순함이 보이면 좋겠지만 어디 사람이 그런가?

“초록은 동색이다"는 말처럼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다는 옛말이 도돌이표처럼 매해 계속되는 다름이 용인되지 않는 ‘원래’의 틀 안에 갇혀 그들만의 리그전은 점점 진화해 간다.

박미주 교수(작사가. 김포대 특임교수)
박미주 교수(작사가. 김포대 특임교수)

[박미주 교수(작사가. 김포대 특임교수)]
한국 에니어그램 경영협회 부대표
박미주의 마음연구소 소장
대중가요 작사가
2014년 서울 경제 100인의 CEO 선정
김포대학교 특임교수(태권도융합과)
파주민보, 미디어파인 칼럼리스트 外

[학력사항]
서강대학교 경영학사
중앙대학교 창업 대학원 기후경제학 석사

[저서]
공감세상ㆍ생각으로 피어나다
에니어그램 인생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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