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두 번 열리는 바닷길과 선재도 목섬
-선재도 해변과 카페 ‘뻘다방’

[미디어파인 칼럼= 조동범 시인의 공간 읽기] 빛을 잃어버린, 눈이 멀어버린 대장장이가 있다. 평생 대장장이와 목수로 삶을 일궈온 이가 앞을 볼 수 없게 됐다는 건 앞으로 남은 모든 삶이 무너지는 일이었을 거다. 너무나 큰 고통이었을 것이기에 우리가 그 절망의 깊이와 크기를 헤아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 터이다.
평생을 가까이 두었던 쇠와 불을, 나무와 톱을 볼 수도 다룰 수도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서해의 작은 섬 선재도에 살던 그가 바닷가 마당에 앉아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다의 소리와 바람뿐이었을 것이다. 막막한 어둠의 저편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그는 수평선 너머를 떠올렸을까?
그런 그가 어부가 되었고, 그의 곁에는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들이 있다. 아들은 어부가 된 아버지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앞을 볼 수 없는 어부는 바닷물이 빠진 갯골을 따라, 아득한 수평선이 있던 곳까지 걷고 또 걷는다. 눈이 먼 어부가 바다의 한가운데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해변으로부터 이어진 줄과 줄에 건 갈고리뿐이다.
그물이 있는 곳까지 이어진 줄이 길이고, 그것이 곧 그의 눈이다. 그는 줄의 길을 따라 나아가 바다 한가운데 쳐놓은 그물의 물고기를 잡는다. 그가 그물에서 거두어들인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삶에 대한 놓을 수 없는 애착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바다’에 담긴 뻘다방의 사연

이것은 인천 옹진군 선재도에서 ‘뻘다방’을 운영하는 사진작가 김연용 씨와 그의 아버지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의 일이고 이제 그의 아버지는 세상에 없다. 그들이 키우던 ‘바다’, ‘향기’, ‘소리’ 세 마리 개도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후 김연용 작가가 아버지와 함께 꾸리던 작은 식당과 민박집 ‘바다향기’는 ‘뻘다방’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역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김연용 작가 가족의 사연은 2000년대 초반 한 방송사에 의해 <아버지의 바다>라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는데, 지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03년 출간된 김연용 사진 산문집 『아버지의 바다』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 책을 읽고 그가 아버지와 함께 운영하던 ‘바다향기’에도 다녀온 적 있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은 희미하지만, 소박한 식당에서 맛있게 식사했던 일도 떠오른다.
얼마 전 불현듯 <아버지의 바다>가 생각났고, ‘바다향기’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지 궁금하여 선재도 ‘뻘다방’에 다녀왔다. ‘뻘다방’은 이름은 물론이고 분위기까지 ‘바다향기’ 때와 크게 달랐는데, 그런 변화의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바다향기’의 기억을 가지고 ‘뻘다방’을 다시 찾은 날 김연용 작가를 만나 진솔함이 담긴 지난 이야기를 듣게 된 건 큰 행운이었다.
목섬을 바라보는 삶과 바다의 소리

‘뻘다방’의 이국적인 모습은 사진가이자 여행 작가이기도 한 김연용 씨의 의지와 취향이 투영된 것이기도 했지만, ‘바다향기’가 ‘뻘다방’으로 변한 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는 듯싶었다. ‘아버지의 바다’ 사연이 매스컴과 대중에 의해 소비되는 부담도 작용한 것 같았다. 자신에게 덧입혀진 효자 프레임도 부담스럽게 느껴졌고 자꾸만 신파로 몰아가는 매스컴의 시선에 거부감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듣고 그가 느꼈을 마음의 불편함과 무거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김연용 작가는 내게 ‘바다향기’가 ‘뻘다방’의 시작임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바다향기’의 바다와 ‘뻘다방’의 바다가 다르지 않은 것처럼, 지금의 그에게 20여 년 전 순수한 청년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여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세월이 흐르며 ‘바다향기’와 그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뻘다방’에서 바라본 바다는 오래전 그때와 다를 바 없이 먹먹하게 펼쳐져 있었다. 지척에 있는 목섬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작년 겨울 선재도 여행 중에 목섬까지 이어진 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썰물이 되면 바닷길이 열리는 섬. 목섬을 지나쳐 수평선 너머까지 이어진 듯 펼쳐진 모랫길이 무척 아름다웠다.
갯벌을 양편에 둔 모랫길을 걸어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의 숲을 바라본다는 것. 그리고 그 너머, 더 먼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마 김연용 작가의 아버지는 모랫길 옆 갯골을 따라 바다가 물러난 저 너머 어딘가까지 걸었을 것이다. 빛을 볼 수 없는 암흑의 바다에서 그는 바다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핫플레이스가 된 ‘뻘다방’의 진심과 바다

선재도 핫플레이스가 된 ‘뻘다방’의 성공은 몇 년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버지를 향한 김연용 작가의 헌신과 사랑을 알기에 정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시에서 대학에 다니던 20대 청년이 고향인 서해의 작은 섬 선재도로 돌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뻘다방’의 모습은 예전 ‘바다향기’ 때와 많이 달랐지만, 그곳이 ‘아버지의 바다’라는 사실은 변함없는 것이기에 그저 좋았다.
집에 돌아와 김연용 사진 산문집 『아버지의 바다』를 다시 읽는다. 2003년 출간된 이래 늘 곁에 두고 읽고 있는 책이다. 이토록 오랫동안 반복해서 읽은 책이 있었던가. 사진 속, 앞을 볼 수 없는 아버지는 캄캄한 바다를 걷고 있을 터지만, 저편 어딘가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바다』는 정직하게 ‘아버지의 바다’를 기록한 책이다. 그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선재도 바닷가에는 여전히 그 시절을 기억하는 바다와 누군가가 있다. 선재도 바다의 윤슬을 떠올릴 때면 『아버지의 바다』가 기록한 20여 년 전의 먹먹한 아름다움이 먼저 생각난다. 겨울이 물러가면 또다시 봄날의 ‘아버지의 바다’를 보러 가려 한다. ‘뻘다방’, ‘바다향기’ 그리고 언제나 아련한 ‘아버지의 바다’를 만나기 위해.

[조동범(시인, 인문학자)]
하루의 대부분을 읽고 쓰고 강의하며 지내는 강의집필노동자이다.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은 이후 몇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시와 산문, 비평과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고 있으며 대학 안팎에서 시와 시론, 글쓰기와 인문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낯선 세계의 흔적을 찾아 떠도는 여행자이기도 하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을 실천하며 길 위의 삶을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