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철홍의 생각에 관한 생각] 오늘은 완연한 봄이다. 낮 최고 기온이 23℃다. 늦은 아침을 먹고 북한산 백운대에 오른다. 새로 산 중국산 스틱을 챙기고, 작년 스타벅스 리저브 뉴욕에서 사 온 텀블러에 동생이 사준 원두를 내려 담는다. 사과도 하나 깨끗이 씻는다.
코스는 우이동 - 소귀천 – 대동문 – 용암문 – 백운 봉암문 – 백운대 – 백운대피소 – 하루재 – 우이동이다. 약 22,000 걸음, 13km 정도다.
용암문에서 만경대를 우측에 두고 돌아 나가면 백운대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백운대 동쪽 암벽에 소나무가 박혀, 보는 장소에 따라 동양화 같은데 사진을 찍으면 별로다. 은평구 방향에서 올라오는 저 아래 지점에서 사진을 찍으면 바위와 소나무가 산수화처럼 나올 것 같다. 은평 쪽에서 올라오는 길과 용암문 방향에서 돌아가는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등산 코스를 바꾼다. 은평 방향으로 내려간다. 가파르다. 한참을 내려간 곳에서 백운대 동쪽벽을 사진에 넣으려고 하는데 각이 나오질 않는다. 대상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보인다. 뇌가 잘못 계산한 것이다. 오르는 길에 땀이 뚝뚝 떨어진다.
사진을 찍고자 하는 욕심에 30분 정도를 허비하고 백운대에 오른다. 등산객들이 백운대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섰다. 나는 숨은벽을 찍는다. 인수봉에는 암벽 타는 이들이 줄에 매달려 있다. 백운대에 오르면 나는 너럭바위 아래 숨은 공간을 찾는다. 가끔 고개를 숙이고 암벽 타는 분들이 그곳에 오른다. 그곳은 나만의 아지트다.
![알 수 없는 인생 [김철홍 칼럼]](https://cdn.mediafine.co.kr/news/photo/202504/65637_99019_4513.png)
텀블러를 꺼내 커피를 마신다. 한 모금 마시고 경사진 바위에 아슬아슬하게 텀블러를 세운다. 이렇게 새워 두는 게 위험하다고 직감한다. 약간 힘을 줘 어느 정도 힘에 넘어가는지 시험을 한다. 위험을 인지했으므로 그냥 두기로 한다. 몇 번에 걸쳐 커피를 마시고 텀블러를 그 자리에 세운다. 바람이 사과를 싸 온 비닐을 배낭에서 꺼내 벼랑으로 날려 보낸다. 따라가다가 멈춘다. 갈 수 없는 낭떠러지다. 한참을 지켜보는데 비닐은 멀리 바람에 날아갔다가 다시 우측 나무에 걸렸다. 잡을 수 없는 공간에서 다시 잡을 수 있는 공간으로 날아온 비닐을 주워 와 가방에 단단히 넣는다.
다시 자리에 앉자, 김윤아의 <야상곡>이 흐르고 햇볕 아래서 나는 커피를 마신다. 그녀의 가사는 한 편이 시다.
<야상곡>
바람이 부는 것은 더운 내 맘 삭여주려
계절이 다 가도록 나는 애만 태우네
꽃잎 흩날리던 늦봄의 밤
아직 남은 님의 향기
이제나 오시려나, 나는 애만 태우네.
애달피 지는 저 꽃잎처럼
속절없는 늦봄의 밤
이제나 오시려나, 나는 애만 태우네
구름이 애써 전하는 말
그 사람은 널 잊었다.
살아서 맺은 사람의 연
실낱 같아 부질없다.
꽃 지네 꽃이 지네, 부는 바람에 꽃 지네
이제 님 오시려나, 나는 그저 애만 태우네
바람이 부는 것은 더운 내 맘 삭여주려
계절이 다 가도록 나는 애만 태우네
꽃잎 흩날리던 늦봄의 밤
아직 남은 님의 향기
이제나 오시려나, 나는 애만 태우네
텀블러를 세우고 우측 위를 보니 한 사내가 바위 위에 서 있다. 실루엣이 멋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휴대폰을 들다가 텀블러를 친다. 텀블러가 굴러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순간 놀란다. 저 아래 등산객들이 바위를 오르고 있는데 혹시 머리에 맞는 것이 아닐까? 텅텅 소리가 몇 번 나고 아무 소리도 없다. 다행이다. 누군가의 머리를 친 건 아니다. 헐레벌떡 일어나 아래로 내려간다. 텀블러는 바위와 바위 사이에 긁히고 으그러진 채 플라스틱 뚜껑은 더 이상 텀블러에서 커피가 흐르지 않게 입구를 막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미국 한 달 살기하고 돌아오면서 기념품이 고작 텀블러 하나였다는 생각이 미친다. 이 기념품이 아차 하면 무기가 될 뻔했구나. 새옹지마가 될 뻔했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백운대를 내려간다. 내려가는 동안 해가 지면서 산과 산이 겹치는 실루엣이 멋있다. 오리바위에서 사진을 찍는다. 멀리 한강이 보이고 서북쪽 도시가 보인다. 그 끝에서 백운대 암벽이 보이고, 그곳에서 어떤 이들이 암벽등반 중이다. 휴대폰 사진을 쉼 없이 찍는다. 각도를 달리하고 위치를 달리하면서 여러 장 사진을 찍는다. 60℃에 가까운 경사다. 사람들이 암벽을 시작하는 곳에서 한 줄에 몸을 맡기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온다. 사진 속 그들이 멋있다.
그렇구나. 아까 이 동쪽 벽을 사진에 담으려고 등산 코스를 바꿔 허비한 시간이 허비한 게 아니었구나. 이렇게 멋진 장면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거구나. 인생은 알 수 없구나. 화가 복이 되고, 복이 화가 되기도 하는구나.
하산길에 인수암을 지나가는데 문패글이 보인다.
相中無佛 佛中無相
네이버 블로그 ‘흐르는 강물처럼’님은 아래와 같이 푼다.
상(相)으로 보면 부처를 볼 수 없고, 부처에게는 상(相)이 없다.
상(相)이란 무엇일까? 산스크리트어 lakṣaṇa라고 하는데, 모습 · 모양 · 형상 · 상태를 말하고, 관념이나 의식에 형성된 특징 · 특질 · 고정관념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상(相)이란 외형적, 피상적인 것, 굳어진 생각으로 말한다.
따라서 그런 상(相)으로 대상을 보면 부처가 될 수 없고, 부처에게는 그러한 상(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 나오는 "약견제상(若見諸相)이 비상(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는 구절도 같은 내용이다.
나는
色卽是空 空卽是色,
빛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현상이 인수암 문패글과 연결된다.
불확정성의 원리, 상보성, 양자 얽힘이
오늘 백운대에서 일어난 것은 아닐까?
부처가 되고자 하는 나와
부자가 되고자 하는 나는
세상과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나에게서
서로 만난다.
오늘 백운대는 아찔하고도 아름다웠을 뿐이다.

[김철홍 대표]
현) 세음세하태양광발전소 대표
전 KCB대표이사
전 서울신문 ESG위원회 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