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파인=박미주 교수의 세상사는 이야기] 언제부턴가 민주적으로라는 이름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집단행동으로 위협을 가하거나 농성을 해도 된다’는 것이 되어 버렸다.
국민이 모든 결정의 중심에 있는 민주적(民主的)이라는 표현이 모호해진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불어온 한류열풍에 한국의 문화를 보고, 경험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우리 사회의 민주적인 방법은 집단행동의 시위 문화가 K-Culture의 한쪽 켠이 돼 ‘구경했다’, ‘안했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는 현실에 아이러니하면서도 자국민으로서 부끄러운 소리가 되기도 한다.
그리도 소란스럽던 ‘주권 행동’이라는 명분을 또 그리 소란스러운 집회들로 풀어내고야 마는 권리(權利)가 막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저 끝에는 무엇으로 남은 것인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목적에 의한 영웅심리?
이쯤 우리는 생각해 내야 한다. 그토록 뜨겁던 집단 활동에 반응하고 참여했던 이유가 진정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활동에 대한 해답을 얻어내야 한다.
막연하게 누군가의 활동에 우연하게 자리하다 참여하게 되었다는 식의 우연을 가장한 자신의 이미지가 오해된 프레임에 갇혀 있게 하지 않으려면 내 스스로 자신의 그 뜨겁던 활동에 대해 자신의 소신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애국(愛國)이라는 바탕 된 마음에서 오는 촉진을 그대로 움직였다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보면 암울한 마음이 들기도 하다.
그것은 충동적으로 휩쓸려서 함께 소리내고 함께 행동했던 막연한 대답들을 많이 들었던 탓이기도 하다.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민주적인 방법의 ‘다수결’이라는 규칙을 선택해서 반장도 뽑고 회장도 뽑았었다. 우리가 왜 그렇게 다수의 표로 결정을 하는 민주적 방법을 선택해 왔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만한, 결국은 ‘전체가 보는 앞에서 모두의 의견대로’라는 것이 ‘다수의 사람이 원한다는 합리적인 대답이었을 테니까’가 답인 것이다.
그렇다. 우린 그렇게 다수의 선택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육을 ‘민주적이다’라는 평가로 받아 왔고 그렇게 하더라도 보이게 보이지 않게 예측하는 것과 다른 또 다른 변수가 있어 오곤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그 변수에 역행하는 것보다는 어쩌면 많은 사람은 분명한 변수의 데이터를 증명하고 이해가 되는 합리적인 결과 값을 원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생각하는 대로가 아니면 분열된 집단행동으로 보여주는 눈살 찌푸리게 하는 분쟁이 아닌 합리적으로 양방향 소통된 공감을 생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적인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사회적 동물’인 사람이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가, 자신의 입장이 모호할 때 할 수 있는 말이 ‘나는 잘 모르겠다. 누가 가자고 하길래, 또는 말하길래’가 아닐까~
건강한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우리 사회가 외국인들에게 이익과 분쟁의 집회 모습인 시위문화가 ‘K-Culture’로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잠시, 한낮 여름 태양처럼 뜨거웠던 집단 활동이 멈췄을 때 냉정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과정으로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권리(權利)는 무엇이었고,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민주적(民主的)인 방법은 무엇이었는지를 숨 고르기하듯 들여다보는 여유는 바로 지금인 것이다.

[박미주 교수(작사가. 김포대 특임교수)]
한국 에니어그램 경영협회 부대표
박미주의 마음연구소 소장
대중가요 작사가
2014년 서울 경제 100인의 CEO 선정
김포대학교 특임교수(태권도융합과)
파주민보, 미디어파인 칼럼리스트 外
[학력사항]
서강대학교 경영학사
중앙대학교 창업 대학원 기후경제학 석사
[저서]
공감세상ㆍ생각으로 피어나다
에니어그램 인생 극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