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테레즈 라캥’(문학동네, 박이문, 2025)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2009)’의 원작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소설이다. 소설은 19세기 파리의 어두컴컴하고 습한 뒷골목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햇빛이 들지 않는 점포, 낡고 좁은 계단, 눅눅한 공기로 가득한 침실. 그곳은 에밀 졸라가 만든 실험실이다. 에밀 졸라는 그 공간에 창백하고 신경증적인 인물들-테레즈, 카미유, 라캥 부인-을 밀어 넣는다. 그리고 그들과는 전혀 다른, 활기로 가득하고 이기적인 인물 로랑을 투입한다. 졸라는 플라스크에서 일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2025년에 다시 읽는 손택1970년대에 쓰인 수잔 손택의 ‘여자에 관하여(윌북, 2025)’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강력하고 유효한 텍스트로 남아 있다. 이 책이 페미니즘 이론의 고전이라서가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과 '진영 윤리'가 예술의 평가 기준이 되어버린 지금, 손택은 이미 반세기 전 그 함정을 꿰뚫어 보았다. 이 글은 ‘여자에 관하여’ 전체를 조망하기보다, 그의 사유를 가장 치열하게 보여주는 ‘페미니즘과 파시즘’을 둘러싼 논쟁을 다루고자 한다.손택은 예술이 도덕의 도구로 전락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경계선은 어디에나 있다. 명시적인 형태로, 때로는 보이지 않는 형태로. 인종과 민족, 인간과 자연, 젠더와 섹스 사이, 그것은 놓여있다. 경계선을 넘나드는 사람은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욘 A. 린드크비스트의 소설집 '경계선'(욘 A. 린드크비스트, 남명성 옮김, 문학동네, 2021)에서 이러한 선들은 허물어지거나 그 구획을 달리한다. 그의 소설에서 섹스와 젠더, 인간과 괴물 사이의 경계는 사라지고(‘경계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임시교사’) 역시 흐릿해진다. ‘지나간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잘생기고 부유하며 능력까지 갖춘 남자, 그리고 그를 외면하는 당찬 여자. 이들이 서로를 알아가며 오해와 편견을 허물고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의 원형이다. 그 시작점에는 제인 오스틴의 걸작 『오만과 편견』(1813)이 있다. 200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 드라마, 소설 속 연애담 곳곳에서 이 작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는 이 소설의 현대적 변주다. 레이스 달린 드레스와 마차 바퀴 소리가 울리던 무도회의 밤, 계급과 예절이 숨결처럼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집 ‘레이디스’를 읽는 독자들은 기이한 감정과 마주한다. 그 감정은 두려움과 불안, 수치심이 뒤엉킨 채, 이상하게 낯익다. 우리는 일상에서 한 번쯤 이런 감정과 마주한 적이 있다. ‘레이디스’에는 피가 튀는 장면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곧 자신이 느낀 감정이 어디에 기인하는지를 알아차린다. 우리가 느끼는 진짜 공포는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늘 사소하고 익숙한 일상 속에서 불쑥 고개를 든다. 그렇다. 진정한 공포란 거대한 사건 사고보다는 늘 사소하고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흰 머리칼 아래 숨겨진 욕망과 상처, 그리고 늦었으나 후련한 복수. ‘스톤 매트리스’는 버티기라는 방식으로 살아남은 여성의 목소리를 문학의 중심으로 불러낸다. 지금까지 대중문화와 소설 속에서 노년기의 여성은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그들은 경험에서 우러난 지혜와 완숙미를 무기로 쓴다. 거친 남성성에 지배당하는 남성을 따뜻한 모성애로 감싸 안는다. 젊은 여성에게는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제시하는 멘토 역할을 한다. 때로 그들은 심술궂은 노파로 등장하기도 한다. 딸의 욕망을 억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후텁지근한 열기가 턱 끝까지 치받친다. 밤을 지배하는 것은 한낮의 뙤약볕만큼이나 강렬한 지열(地熱)이다. 잠깐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잡초와 덤불이 인간의 영토를 공격해 올 것이다. 당신은 이 열사의 땅에서 고립되고 무너지고 절망한다. 1950년대의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에서 제정신으로 지낼 수 있을까. 당신이 이미 문명이 주는 편안함에 너무나 익숙하다면?소설 ‘풀잎은 노래한다’는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이 쓴 첫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기란 아프리카의 한복판에서 차양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사람들은 그 시기를 광란의 시대라 불렀다. 1920년대의 미국은 화려하게 반짝였다. 그 아름다움의 토대가 위태롭다는 사실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의 국력은 유럽을 역전했다. 마천루가 들어서고 자동차가 거리를 누볐다. 발목을 드러낸 드레스 차림의 플래퍼들이 재즈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술잔에 넘쳐나는 샴페인 거품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풍요를 상징했다. 그 화려한 시기는 영원히 지속할 듯했다. 1929년 대공황이 샴페인 거품 같은 모든 잉여물을 거두어가기 전까지.소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주변 사람이 갑자기 스스로 세상을 등지면 어떤 기분이 들까? 게다가 자살한 그이가 누구보다도 가까운 가족이라면? 남겨진 사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남은 이들은 오랫동안 망자의 마음에 동화하려 애쓰며 그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과정을 추적한다. 물론 그것은 추측일 뿐, 실체적 진실과는 상관없다. 누구도 망자의 마지막 심정이란 미궁에 가닿을 수 없다. 이 책의 저자 페터 한트케는 어떤 감상도 없이 어머니의 죽음을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조차 자신의 글쓰기 철칙을 버리지 않는다. 독자는 이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초점 없는 눈빛, 비틀거리는 발걸음.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다. 움직이는 시체처럼 보이지만 사자(死者)는 아니다. 부두교 신자들은 좀비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맹독과 접촉한 사람들은 가사 상태에 빠진다. 장례식을 치르고 매장된 사람들을 무덤에서 파헤친다. 다시 그들에게 약을 투여하고, 고문한다. 그렇게 그들은 좀비로 다시 태어난다. 좀비들의 뇌는 약물 중독과 고문으로 피폐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좀비들을 농장에서 노예로 일하게 한다. 그들은 실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미 서류상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모든 인생은 기억과의 대화이다. 숱한 과거의 순간, 우리는 여러 갈래 선택의 기회와 마주한다. 우리가 선 현재는 그 선택을 따른 귀결이다. 앤드루 포터의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나오는 인물들은 한때 사랑했으며, 그 사랑에 관한 기억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들의 사랑은 절절하고 정열적이거나 잔잔하고 애틋하다. 우리 마음에는 늘 ‘만약’이란 질문이 떠돈다. 그때 우리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우리는 다른 현재를 살아가고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그 시점, 우리 생을 되돌릴 수 있는 순간으로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모닥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는 사람들 뒤로 늑대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들은 사람들이 먹다가 던져준 뼈에서 야무지게 살을 발라 먹었다. 유달리 온순하고 사람을 따르는 새끼 늑대가 있었다. 먹이를 주면 손을 핥았고, 다가가도 도망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늑대들을 데려와 기르기 시작했다. 데려온 늑대들을 교배하자 더 온순하고 사근사근한 새끼들이 태어났다.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늑대와는 확연히 다른 동물이 탄생했다.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구(Men's best friend)라 불리는 개의 탄생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이제 ‘매트릭스’ 같은 영화 속 현실이 아니다. 2016년 알파고는 딥러닝 방식을 대중화했다. 2017년 구글 트랜스포머의 등장을 거쳐, 2022년 드디어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렸다. 소설 ‘가난한 사랑의 미래’는 20년 뒤, 가까운 미래에 인류에게 닥친 위기에 관해 이야기한다.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에 밀려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방황한다. 이들의 가난하고 남루한 삶 속에서도 과연 사랑은 가능할까. 가난한 사랑의 미래는 어떤 얼굴을 지니고 있을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다. 불행의 원인은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때문일 수도, 노름에 빠진 아내 때문일 수도 있다. 때로는 부모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르게 성장한 아이가 문제다. 비혼주의가 유행이고, 아이 없이 사는 부부가 늘어간다. 현재 한국의 출산율은 OECD 국가 중 최저이다. 다른 나라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세계 주요국의 출산율은 1960년대 이후 반토막났다. 그러나 여전히 화목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영화와 소설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매체다. 두 장르 다 허구적 서사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같다. 소설이 언어 외의 수단으로는 접근하지 못할 인간의 복잡하고 내밀한 이야기에 관해 다룬다면, 영화는 소설이 제공하지 못하는 내용을 시청각적으로 구현한다. 소설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영화 제작에는 소설 출간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든다. 영화는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자본 집약적인 장르다. 중견 소설가 찰스 부코스키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영화 작업에 뛰어든다. 이 책은 할리우드 시스템에 대한 부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소설 ‘백년의 고독’을 읽는 것은 광대한 미로에서 길을 잃는 경험과 유사하다. 미로 곳곳에는 흰 나비가 날아다니고, 노란 꽃비가 내린다. 4년 11개월하고도 이틀이나 내리는 비에 몸이 젖는가 하면, 뇌수까지 파고든 미녀의 체취에 몸서리친다. 소설은 백년 동안 부엔디아 가문에 일어나는 흥망성쇠를 다룬다. 독자들은 6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의 가계도를 그리며 소설에 탐닉하다가 어느덧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에 푹 빠지고 만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라는 타고난 이야기꾼은 라틴 아카데미를 배경으로 펼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전쟁은 단 하루만으로도 모든 인간의 삶을 바꿔놓는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서 사람들은 총구를 디밀며 서로를 위협한다. 분단국가인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늘 전쟁의 위협 속에 살아간다. 전쟁이 가져온 삶의 변화는 이렇듯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누군가는 전쟁이 가져온 인간성의 말살에 대해 한탄한다.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보여주는 전쟁의 참상은 아비규환이라는 비유로도 모자란다. 소설은 전쟁이 가져온 인간성의 상실을 논하기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레몬즙으로 쓴 비밀 편지를 주고받던 시절이 있었다. 봉투 안에 든 백지를 불 위에 가져가 댄다. 종이에 서서히 갈색 글자가 나타나는 순간, 편지는 화르르 불타오른다. 삶이 편지라면 사랑은 곧 사라질 글씨와도 같다. 불붙는 순간, 인생마저 불사르는 몹쓸 사랑이다. 소설 ‘슬픈 카페의 노래’에서 카슨 매켈러스는 레몬즙으로 쓴 메시지를 ‘한 인간의 영혼 속에 써진 글’에, 불을 위스키에 비유했다. 어밀리아가 카페에서 팔던 음료는 술이 아니었다. 영혼을 따뜻하게 데우며 생 이면의 진실에 눈뜨게 하는 마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여기 참을 수 없는 지루함 때문에 무작정 차를 몰고 집을 나선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여정에는 뚜렷한 계획도 목적도 없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내키는 대로 좌회전과 우회전을 반복했다. 그 결과 그는 이제 막다른 길 끝자락에 섰다. 흙에 차바퀴가 끼어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다. 지루함은 공허로, 공허는 두려움으로 바뀐다. 그는 숲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을 내렸다. 차 안에서 조용히 아침을 기다리거나,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대신 깊은 숲으로 향하는 오솔길로 들어선 것이다.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서늘한 시체공시소에 누운 시신은 이름이 없다. 치아와 지문,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통해 그가 누구인지 유추할 뿐이다. 끝까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몇몇 시신은 영원히 호명할 수 없는 존재로 남는다. 이름 없는 변사체로 스러져가는 그들을 애도하는 이는 역시 이름 모를 어느 검시의다.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한 망자들은 레테의 강을 건너지 않는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때, 그들은 비로소 망각의 강물을 들이켠다. 우리는 범죄 드라마를 통해 수많은 시신이 조각나고 해체된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