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몬스터 콜’(2016)은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2007)으로 기예르모 델 토로를 반하게 만든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 가는 경유지가 된, 기념비적인 ‘아픈 동화’다. 12살 코너(루이스 맥더겔)는 암 투병 중인 엄마(펠리시티 존스)와 외딴집에서 단둘이 사는데 학교에선 ’왕따‘다.

한 급우가 이끄는 무리에게 매일 얻어맞고 산다. 아버지는 엄마를 임신시켜 미대 진학을 가로막은 것도 모자라 재혼해 딸을 낳았지만 무능력해 코너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 코너는 엄마의 병수발을 드느라 자신의 삶을 빼앗겼다. 매일 싱크 홀로 추락하는 엄마를 구하려 안간힘을 쓰는 악몽을 꾼다.

엄격한 외할머니(시고니 위버)는 자신의 집에서 살자고 재촉하고, 코너는 엄마를 떠나는 것도 싫지만 할머니와 사는 건 더 싫어 강하게 거부한다. 어느 날 밤 12시 7분에 집 앞 공동묘지의 오래된 주목나무가 거대한 몬스터(리암 니슨)로 변해 나타나 앞으로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마지막 이야기는 코너가 해야 한다고 압박하는데.

그 세 가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악한 듯했지만 악하지 않고, 착한 듯했지만 그렇지 않게 애매모호하게 변한다. 특히 두 번째 이야기의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목사 얘기에 몬스터가 말하고자 하는 교훈의 핵심이 담겼다. 목사는 두 딸이 중병에 걸리자 여론이 안 좋은 약제사를 찾아간다.

약제사는 목사 소유의 주목나무를 제공할 것과 더불어 두 딸을 위해 믿음도 버릴 수 있느냐고 묻고, 목사는 가차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결과 두 딸은 눈을 감고, 몬스터는 목사의 집을 부숴 버린다. 이 영화는 열악한 환경 탓에 일찍, 지나치게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 코너의 내면의 고뇌와 갈등이 소재다.

코너가 “왜 떠났어요?”고 묻자 아버지는 “나와 엄마는 너무 어렸어”라고 답한다. 어릴 때의 ‘불장난’으로 아내가 코너를 임신하게 만들더니 열정이 식자 달아난 것. “세상은 사랑만으로 부족해. 그것만으로는 못 살아”라는 게 해명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고 하자 코너는 “거기서 사는 거예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집이 좁아 코너가 기거할 공간이 없는 데다 자신의 경제적 무능력 때문에 양육비도 감당할 수 없다고 부정한다. “그럼 무얼 하려 왔어요?”라는 코너의 대답에 아버지는 “인생이란 게 다 그런 것”이라는 옹색한 변명만 늘어놓을 따름이다. 우리는 일찍 성인이 됐거나 괴물이 된 아이를 어렵지 않게 보곤 한다.

코너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 얌전하고 조용하며 착한 듯하지만 사실 그의 내면엔 괴물도 공존하고 있었으니 바로 몬스터였던 것. 그러나 그 몬스터는 스스로 생성된 게 아니라 이런 아버지 같은, 혹은 엄마도 일부 가세한 환경 탓에 자라난 것이다. 물론 사회도 한몫했을 것이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쓰던 오래된 프로젝터를 꺼내더니 흑백 필름 ‘킹콩’을 틀어 준다. 이는 엄마와 코너의 내면에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상징적 시퀀스다. 한밤에 나타난 몬스터가 “너를 잡으러 왔다. 그런데 왜 안 도망가니?”라고 묻자 코너는 “엄마를 괴롭히지 마”라고 응수한다.

그 후 코너는 할머니가 아끼는 100년도 넘은 벽시계를 비롯해 세간을 풍비박산 내는가 하면 자신을 괴롭히던 급우를 무차별 폭행하기도 한다. 몬스터의 세 번째 이야기가 끝나자 코너는 자신의 악몽을 털어놓는다. 엄마는 결국 싱크홀 속으로 떨어지는데 사실은 떨어진 게 아니라 코너가 손을 놓은 것이었다.

코너는 엄마의 병이 치유되지 않을 줄 알고 있었지만 엄마는 계속 잘될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 시간이 길어지자 엄마의 완치를 간절히 바라던 코너의 마음 한구석에 차라리 끝나 버리길 바라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고, 코너는 그런 자신의 사악한 마음에 진저리를 쳤고, 죄악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를 털어놓으며 코너는 엄마를 구해 달라고 애원하지만 몬스터는 “엄마가 아니라 너를 구하러 왔다”라고 답한다. 몬스터는 코너 자신이니까. 그러면서 “넌 그저 네 고통을 지우고 싶었을 따름”이라고 코너를 위로하고 변호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의 아이러니를 “왜냐면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해명한다.

인간은 “고통이 되는 진실보다는 차라리 위안이 되는 거짓을 믿는 동물이지. 뭘 믿는지가 아니라 뭘 하는지가 중요해”라며. 이 얼마나 당당한 이원론 혹은 이항대립의 해체인가! 그 어떤 ‘사람’도 시종일관 선하거나 악할 수 없다.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 역시 요람부터 무덤까지 내내 평탄할 수는 없다.

몬스터는 “난 이 땅만큼 오래됐다”라고 말한다. 즉 인류가 생긴 이래 사람은 날 때부터 착하거나 악한 사람으로 나뉘어 시종일관 지속되는 게 아니라 환경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이리저리 변전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새로운 운명론, 생래론이다. 그런 인간이기에 결국 치유를 위해선 진실을 인정하고 믿음을 품어야 한다는 게 결론이다.

“손을 잡아야 놓을 수 있고, 놓아야 잡을 수 있다”라는 논지는 흔하게 들어 본 구성이지만 이 영화와 결합하니 새삼스레 폐부를 찌른다. 주먹을 쥐어 봐야 모래와 물은 흘러내리고, 소중한 건 대부분 으스러진다. 주먹을 펴고 손바닥을 하늘로 향해야 그 위에 그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이제 코너는 ‘애어른’이 아니라 정상적인 성장을 한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동안 꽁꽁 잠가 놨던 3층 방 문 열쇠를 주며 “이젠 네 방”이라고 말한다. 그건 엄마가 성장한 방이었다. 엄마의 스케치북엔 놀라운 그림들이 코너와 유사한 수준의 멋진 화풍으로 그려져 있었다. 엄마 역시 코너 또래 때 똑같은 자기 몬스터와의 만남이 있었던 것. 코너의 ‘애어른’과 그로부터의 성장을 정성적으로 밝히는 시퀀스다.

착하고 약한 사람일수록 힘들어도 티를 잘 안 낸다. 야비한 사람일수록 추레해 보이려 과장하지만 그게 더 안 먹힌다는 걸 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면의 괴물을 들키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아플수록 내면의 이기심을 인정하라! 손에서 놓고 싶으면 더욱 강하게 붙잡아라! 내내 비탄을 자아내다가 끝에 희망을 주는 따뜻한 이 동화의 교훈을 마음속 깊이 갈무리할지니!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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