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서늘한 시체공시소에 누운 시신은 이름이 없다. 치아와 지문,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통해 그가 누구인지 유추할 뿐이다. 끝까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몇몇 시신은 영원히 호명할 수 없는 존재로 남는다. 이름 없는 변사체로 스러져가는 그들을 애도하는 이는 역시 이름 모를 어느 검시의다.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한 망자들은 레테의 강을 건너지 않는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때, 그들은 비로소 망각의 강물을 들이켠다. 우리는 범죄 드라마를 통해 수많은 시신이 조각나고 해체된 뒤,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우리 모두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맡겨진 기억이 있다. 부모 대신 우리를 돌봐주는 이들은 할머니나 할아버지, 친척, 혹은 이웃이었다.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부풀기도 했다. 소설 ‘맡겨진 소녀’의 주인공 소녀가 그랬듯이. 때로 부모와 떨어져 있는 시간은 기약 없이 늘어났다. 우주에 홀로 남겨진 듯 외롭고 불안했다. 아이들은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다. 세상은 늘 그렇듯 약자에게 친절하지만은 않다. 게다가 어른들은 유년기의 기억을 잊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낀 고독과 혼란스러움이 얼마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흔히 삼포 세대라고들 한다.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청년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치솟는 물가와 불안정한 일자리로 마음 졸이는 그들에게 결혼이란 사치재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할 ‘자유’가 주어진 첫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가 진정한 자유일까? 결혼과 출산은 포기한다고 치자. 그러나 관계와 사랑, 섹스에 관한 욕망까지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엄밀히 말해 포기라기보다 박탈에 가깝다. 우리 모두 불편한 진실을 알고 있다. 연애 시장에서도 부익부 빈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아파트 비상계단에 앉은 오드리 헵번이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부른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등장하는 명장면이다. 달빛은 강물처럼 뉴욕의 밤하늘을 흐르고, 오드리 헵번이 분한 홀리 골라이틀리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애수가 깃들었다. 홀리와 그녀의 이웃인 무명작가 폴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돈 때문에 원하지 않는 사람과 사귀지만,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순수를 잃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물질보다 진실한 사랑을 택하며 그들은 맺어진다. 트루먼 커포티가 쓴 원작에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누군가를 향한 사랑에는 간혹 그 대상이 원치 않는 감정이 끼어들곤 한다. 무방비하게 욕망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어쩌면 모든 사랑은 폭력을 내포할지도 모른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소설 ‘이블 아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뒤틀리고 굴절된 사랑에 고통 받는다. 질투와 소유욕, 광기, 폭력으로 얼룩진 그들의 관계는 이미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 달콤하던 과거는 온데간데없다. 어제의 연인이 전혀 알 수 없는 타인으로 탈바꿈한다. 사랑이란 외피를 뒤집어쓴 폭력은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 육체적 감각마저 의심하게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간혹 길을 걷다 실종자를 찾는 현수막과 마주친다. 빛 바랜 사진 속 주인공은 몇십 년째 나이를 먹지 않는다. 남은 이들의 심경을 차마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실종을 기점으로 남은 이들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 확언이 된 죽음은 절망과 오열을 부른다. 죽음은 망자와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남은 이들이 상실을 받아들일 때, 그들은 마음의 평정을 회복할 기회를 얻는다. 때로 그 죽음은 시대의 야만, 모순과 맞물려 있다. 일터에서 청년들이 죽음으로 내몰릴 때, 열사의 어머니들은 투사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성별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사회는 과연 도래할까. 오랫동안 성(性)은 고정불변한 것으로 여겨졌다. 성(性) 정치 담론과 젠더 개념의 등장, 의학 기술의 발달로 자명해 보이던 현실은 뒤집혔다. TV를 켜면 트랜스젠더 방송인들이 입담을 과시한다. 형제와 남매 간을 거쳐, 이제는 자매 사이가 된 워쇼스키 감독들이 활발하게 활동한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타고난 성(sex)에 매여 산다.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한 변희수 하사에게 그랬듯 타고난 성을 거부한 자에게 사회는 절대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고 대중가요는 노래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이 말을 굳게 믿는다. 사랑, 만남, 종교적 회심과 소명에 관해 운명이라 설명하지 않으면 그에 따르는 열정과 감동은 그 생생한 빛을 잃고 만다. 이처럼 사람들은 어떤 일에서건 필연적 인과를 찾으려 애쓴다. 이 세상이 불확정성과 혼돈이 지배하는 통제하기 힘든 공간이라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까. 아인슈타인조차 우연은 신이 ‘익명’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러나 오늘 우연히 늦잠을 잔 당신이 통근버스를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먹방’은 유튜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 중 하나다. 시청자는 대리만족이라도 하듯, 맛있게 음식을 먹는 유튜버의 모습에 빠져든다. 슈퍼마켓의 진열대, 한 집 건너 하나인 통닭집에는 먹거리가 넘쳐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푸드 포르노’에 빠져 영양 과잉상태일 때, 세계 인구의 3억 명 이상은 기아에 시달린다. 우리나라 역시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보릿고개를 겪어왔다. 기근은 전쟁, 질병과 더불어 인류에게 가장 큰 재앙이다. 굶주림은 인류가 지닌 근원적 공포 중 하나다. 대기근의 가능성은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 작가의 아름서재] 여기 스토너라는 남자가 있다. 1891년, 미국 미주리주의 빈농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조부모가 그랬듯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살아갈 팔자였다. 군청 직원의 권유로 농대에 진학했을 때, 그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우연히 들은 문학 수업에서 시詩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문학으로 진로를 바꾼 뒤, 모교에서 교편을 잡기에 이른다. 파티에서 마주친 여성에게 첫눈에 반해 청혼한다. 높은 신분에 미모까지 갖춘 그녀는 선뜻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스토너는 마침내 종신교수가 되었고 그의 강의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 작가의 아름서재] 현대 의학의 주장처럼 과연 노화란 질병일까. 노화와 질병, 그에 따른 최종 부산물인 죽음은 인간의 숙명이 아니던가. 세계보건기구는 2018년 노화에 질병 코드를 부여했다. 현대 의학이 노화의 종말을 말할 때, 한편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늙고 병들고 죽어간다. 노화와 죽음을 다루는 필립 로스의 문장은 시종일관 건조하고 담담하다. 메스처럼 서늘하게 벼려진 문장이 노년이란 환부를 베고 가른다. 2006년 발표한 ‘에브리맨’은 필립 로스의 스물일곱 번째 장편 소설이다. 막 70대에 접어든 작가가 쓴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사랑이란 파도와 맞닥뜨리게 마련이다. 열정을 동반한 사랑은 파도가 아니라 쓰나미 일지도 모른다. 그것과 조우하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열정의 대상은 무대 위 아이돌일 수도, 우연히 하룻밤을 함께한 상대일 수도 있다. 그러기에는 당신이 너무나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자신하지 말지어다.다른 이들의 욕망을 비웃는 자, 바로 그 욕망의 희생양이 될 터이니. 어떤 사람들은 중년이 다 된 나이에 처음으로 그런 열정에 휩싸인다. 꾸역꾸역 억누른 욕망이 성실한 가장, 사회인, 부모로서의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루아침에 전락한다. ‘변신’에서 잠자 그레고르는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아침,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K는 체포된다. 아무도 그가 왜 기소 당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길고 지루한 소송이 시작되었다.독자들은 K와 더불어 당황하고 분노한다. 인물들은 줄곧 이해하지 못할 말을 늘어놓는다. 미로 같은 소설 속 공간은 끝없이 확장된다. 페이지가 넘어가며 독자들의 의문은 당혹스러운 각성으로 바뀐다.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어느 날 당신이 백여 년 전의 과거로 돌아간다면 당신은 과연 무사히 현재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것은 단지 안락한 현대문물의 수혜를 누릴 수 없는 시공간으로 이동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매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한다. 당신의 허벅지를 파고들 날카로운 개의 이빨을 막아내야 하고 추적자의 시선을 따돌려야 한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목표는 하나다. 당신이 과거로 미끄러져 들어온(time slip) 이유를 깨닫고 그 목적에 부합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 당신에게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