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고 대중가요는 노래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이 말을 굳게 믿는다. 사랑, 만남, 종교적 회심과 소명에 관해 운명이라 설명하지 않으면 그에 따르는 열정과 감동은 그 생생한 빛을 잃고 만다. 이처럼 사람들은 어떤 일에서건 필연적 인과를 찾으려 애쓴다. 이 세상이 불확정성과 혼돈이 지배하는 통제하기 힘든 공간이라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까. 아인슈타인조차 우연은 신이 ‘익명’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러나 오늘 우연히 늦잠을 잔 당신이 통근버스를 놓쳤듯이 세상사에는 어떤 배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과 우연의 조합이 또 다른 우연으로 우리를 이끌 뿐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우주를 총괄하는 법칙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필연적 현상이 우연한 사건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처럼 우리 생은 거대한 ‘결정론’에 갇혀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사에 관한 한 자연법칙 외의 여러 현상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우연이란 말 외에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인생은 개인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한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여정일까. 삶의 어느 대목에서 깊은 허무와 맞닥뜨리기란 우연한 생을 견디는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책장을 덮고 나면, 독자는 우연이 자유, 행운의 다른 말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섭리, 원칙, 형벌과 상관없는 세계는 그 고단한 무게를 벗어던지고 한없이 가볍고 살만한 공간으로 거듭난다. 

‘우연의 생’ 표지와 저자 김운하
‘우연의 생’ 표지와 저자 김운하

 ‘우연의 생’은 우연과 인간의 운명, 예술, 사랑의 함수관계를 다루는 에세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일상의 감상을 가벼운 필치로 써 내려가는 미셀러니와는 다르다. 읽는 이들 역시 조금은 결이 다른 독법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저자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처럼 아포리즘, 문화비평, 수필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시도한다. 장르를 넘나드는 문학 형식은 글쓰기의 본질에 관한 저자의 오랜 고민과 철학에서 비롯한다. 저자는 에세이라는 장르가 본래 형식에서 벗어난 하나의 시도라는 점에 주목한다. 우연이 작용하는 장에서 ‘비틀거리며 방황하며 나아가는 탐구’라는 면에서 저자의 작품은 그의 삶을 닮았다. 저자의 말처럼 그의 글은 ‘자신의 생과 경험을 발판 삼고, 책들을 길잡이 삼고, 사유를 등불 삼아,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가를 탐구하려는 끊임없는 시도‘이다.

 저자가 오랫동안 우연이란 단어에 천착해온 이유는 자전적 경험에서 연유한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화가를 꿈꾸던 소년은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처지에 놓인다. 성경에 나오는 욥처럼 소년은 신에게 인간의 운명에 관해 질문하며 탄원한다. 그러나 비극적 죽음 역시 우연에 불과하다. 날마다 일어나는 죽음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모든 일이 우연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뜻일 테다. 태풍이나 가뭄, 홍수와 해일처럼 자연질서에 속하는 일이다. 비탄이나 슬픔, 인간이 흘리는 피와 눈물은 자연과 우주, 시간 앞에서 흔적 없이 용해된다. 상실에 대한 애도만이 인간의 몫으로 주어질 뿐이다. 

  일 년이 흐른 뒤 저자는 원하던 대학의 정문을 장식한 조형물 앞에 선다. 80년대의 질곡 속에서 저자 역시 시대의 아픔에 휩쓸린다. ‘거의 스무 살이 되도록, 내가 삶과 세계 나 자신에 관해 백지상태나 다름없이 무지했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던 저자는 십여 년이 흐른 후,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지식과 앎으로 스스로 얼마나 교조적인 확신에 빠져있었던가’를 부끄러워하는 회의주의자로 거듭난다. 소년은 빛과 그림자, 순수한 색채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에서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다. 한때, 사람들이 선망하던 ‘검은 양복을 입은 권력의 세계’에 속했던 일을 작가는 ‘실패와 어리석음’으로 규정한다. 

  선과 색, 조형 대신 언어라는 표상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를 선택한-선택이라기보다는 이 역시 우연의 소산이지만-저자는 인문학자이자 소설가로 독자 앞에 선다. 입지전적 이야기, 능력주의의 좋은 예로 소비될 법도 한 삶의 역정을 저자는 ‘우연의 생’으로 규정한다. 그의 인생에 따른 ‘노력과 운의 기적 같은 결합’ 역시 근본적으로는 우연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삶의 추는 능동과 수동의 양극 사이에서 진동하지만 삶은 근본적으로는 훨씬 더 수동태적인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노력해 역경에서 벗어난 이들이 빠지기 쉬운 오만인 '히브리스'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의 형벌을 부른다. 노력으로 손에 넣은 성취 역시 종국적으로 우연에 불과함을 인정하는 겸양만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한다. 

 우연이 빚어내는 예측할 수 없고 불가해한 사건들 앞에서 때로 우리는 무력해지며, 삶은 무의미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 ‘필연적 연쇄’로 이어진 세계라면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저자는 세 장에 걸쳐 ‘클리나멘’이 지닌 신비에 관해 이야기한다. 기계적 결정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클리나멘의 힘은 혁명적이다. 고대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설명한 것처럼 클리나멘은 ‘기울어 벗겨감 혹은 벗어남’을 뜻한다. 이 개념은 현대에 들어 다양한 분야에서 재해석되고 적용된다. 루이 알뛰세르는 클리나멘을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이라 불렀다. 저자는 클리나멘을 ‘주어진 운명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힘’으로 규정한다. 과학자와 철학자만이 클리나멘이 적용되는 장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저서 ‘영향의 불안’에서 작가들이 선배 작가들로부터 받는 영향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사랑에 빠지는 신비하고 불가해한 과정을 설명하는 단어는 운명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다른 일처럼 사랑 역시 몇 번의 우연이 중첩되어 발생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사와 토마시가 만나기 위해서 여섯 번의 우연이 필요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사랑과 더불어 우연이란 신비가 가장 많이 개입하는 장은 예술이다. 쓰기, 읽기, 그리기, 춤추기, 연주하기, 어느 하나 우연이 개입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소설 작법을 예로 들어보자.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플롯을 설정한 뒤, 등장인물의 성격을 설정한다.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주제에 맞게끔 유기적으로 배치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소설가는 없다. 섬광처럼 소설가의 머릿속에 찾아온 모티프가 발아한다. 그 모티프는 때로 누군가의 몸짓일 수도, 신문에서 발견한 어느 기사의 일부일 수도 있다. 어느 순간 소설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서로 결합하고 필요 없는 부분을 떠나보내기도 하며 새로운 유기체로 거듭난다. 

 글은 이제 작가를 더 깊은 사유로 인도해 작품의 골격을 보완하게 하고, 외피를 매끄럽게 손본다. 모든 예술가는 작품이 자기 손에서 떠나 독립성을 획득하는 것을 망연하게 바라본다. 작가의 신체는 그의 경험과 사유, 회상, 고통이 혼연일체가 되어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는 장소다. ‘나 이전에 사건이, 익명적인 사건들이 선행하고 나는 그것을 인칭적으로 표현할 따름이다. 내 살과 영혼에 새겨진 상처 자체가 스스로를 성찰하도록, 표현하도록 하기.’ 저자는 그의 글쓰기를 ‘우연의 글쓰기’로 명명한다. 

 문학 형식의 구분은 일종의 질서화 작업이며 작가의 창의력을 틀에 가둔다. 니체와 파스칼, 몽테뉴, 라 로슈코프, 키르케고르, 에밀 시오랑 역시 체계를 혐오했다. 새로운 형식에 대한 고민 역시 창작의 일부다. 많은 예술가가 새로운 양식에 대해 고민해왔다. ‘철자나 단어를 해체하고 재배열하고 다시 조합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담은 단어를 창조하는’ 애너그램이 그렇다. 특별한 줄거리가 없고 등장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의식의 흐름’ 기법 역시 문학 형식에 대한 거부에서 탄생했다.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 역시 우연과 클리나멘이 개입한다. 감상이란 단지 수동적 행위가 아닐뿐더러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 행위이다. 독자는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뿐 아니라 감상을 통해 작품이 지닌 의미를 확장해 나간다. 독자의 내면세계는 감상을 통해 새롭고 충격적인 인식에 도달한다. 감상 역시 일종의 창조행위다. 

 철학에 대해 직접 설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작가들은 플롯과 은유, 서사를 통해 그 작업을 수행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철학은 현학이란 누명을 벗고 작품 속에 녹아든다. ‘우연의 생’을 통해 저자가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식 역시 철저히 문학의 화법을 따른다. 문장부호와 문장 간의 호흡, 문장을 배열하는 방식이 저자의 심상을 드러낸다. 우연이란 주제 아래 유기적으로 엮인 45장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어떤 장은 길고 풍부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목련’처럼 시적 언어로 구성된 짧은 장도 있다. 리듬과 고저, 장단이 작품을 관통하며 음악적 흐름을 부여한다. 

 첫 장에서 저자는 ‘운명이란 밀실’에서 길어 올린 ‘본질적 장면’을 길어 올리며 시간의 경첩을 연다. 저자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신화, 예술가의 삶, 철학의 역사에서 퍼 올린 우연과 운명,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양자역학과 진화 생물학 등 현대과학이 발견한 우연의 힘이 저자의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고대의 자연철학 용어인 ‘클리나멘’이 현대에 들어와 어떻게 적용되는지, 미세한 변화가 가져온 무질서, 엔트로피가 지닌 전복적 힘에 관해 이야기한다. ‘오해와 착각’에서 비롯된 인간종(種)의 히브리스가 집단적으로 발현될 때, 가져올 전지구적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결국 욕망을 실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행운은 준비된 이들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오늘날 ‘준비된 우연 혹은 행운’을 의미하는 단어 ‘세렌디피티’ 역시 ‘세렌디퍼’의 꾸준한 노력과 결합해 일어난다. 엑스레이나 페니실린의 발견 역시 세렌디피티에 해당한다. 저자는 ‘우리의 노력이 반드시 세렌디피티로 보상받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 역시 이야기한다. 숱한 자기개발서의 달콤한 이야기와 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인생을 순전한 운과 우연에만 기대어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말로 인간의 주체성과 노력이 지닌 힘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저자는 ‘그 숱한 우연의 축복 혹은 재앙들, 우연과 더불어 아름답게 춤추고 싶었으나, 너무 자주 과잉된 격렬함 속에서 중심을 잃거나 혹은 잘못된 스텝을 밟으며 놓쳐버린 손길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제 저자는 생의 의미에 짓눌리지 않는다. ‘이제 생의 의미 따위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생의 우연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우연과 필연의 기묘하고 역동적인 그것이 씨줄과 날줄로 꼬이고 짜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아름다운 문양의 태피스트리’라면, ‘우연의 생’은 깊은 사유와 아름다운 문장을 씨줄과 날줄로 정교하게 짜낸 태피스트리라 부를 만하다. 저자가 만든 태피스트리는 매끄럽지만은 않아 매듭처럼 우리 마음에 걸리는 문장들을 지니고 있다.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고, 사랑을 절대적으로 사랑만을 요구하는 고유한 존재들이 있다. 생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생의 한가운데에 있다…(중략)…생 자체가 매혹적인 유일무이한 한 편의 시가 되길 소망하는 연약한 존재들이 있다.’(본문 275쪽) 

  저자가 공들여 자아낸 섬세하고 아름다운 매듭 앞에 오래 머무르며 사유하기야말로 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우연한 즐거움이 아닐까. 

  저자 김운하는 소설가이자 인문학자이다.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 ‘오이코스 인문연구소’에서 연구와 강연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소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137개의 미로카드’, ‘그녀는 문밖에 서 있었다’, ‘언더 그라운더’ 등의 소설과 ‘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 ‘네 번째 책상 서랍 속의 타자기와 회전목마에 관하여’, ‘카프카의 서재’, ‘릴케의 침묵’ 등의 인문서를 썼다. 공저 ‘지구에는 포스트휴먼이 산다’, ‘인공지능이 사회를 만나면’, ‘인류세와 에코바디’, ‘포스트바디: 레고인간이 온다’ 등을 기획하고 집필했다.(필로소픽, 2022)

이수정 작가
이수정 작가

[이수정 작가]
1973년산. 이화여대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에서 수학했다.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일러스트레이터와 카투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때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소설 쓰기보다 읽고 분석하고 소개하는 일에 더 재능이 있음을 깨달은 행복한 서평가이자 독서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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