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빈농 아들의 묵묵한 일상 ‘스토너’ - 존 윌리엄스 著
한 빈농 아들의 묵묵한 일상 ‘스토너’ - 존 윌리엄스 著

[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 작가의 아름서재] 여기 스토너라는 남자가 있다. 1891년, 미국 미주리주의 빈농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조부모가 그랬듯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살아갈 팔자였다. 군청 직원의 권유로 농대에 진학했을 때, 그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우연히 들은 문학 수업에서 시詩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문학으로 진로를 바꾼 뒤, 모교에서 교편을 잡기에 이른다. 파티에서 마주친 여성에게 첫눈에 반해 청혼한다. 높은 신분에 미모까지 갖춘 그녀는 선뜻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스토너는 마침내 종신교수가 되었고 그의 강의를 들으려는 학생들로 강의실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여기까지는 한 인간의 인간승리를 다룬 입지전적 이야기랄만 하다. 그렇다면 그의 인생을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스토너의 인생 이면을 들여다보자. 그는 진급하지 못하고 평생 조교수에 머무른다. 학과 내에서의 정치 싸움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강의는 인기가 있었지만, 학자로서의 스토너는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의 아내는 그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 중년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사랑을 만났지만 세상은 그들의 사랑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랑하는 딸 그레이스는 과부가 되어 알콜에 의존해 살아간다. 정년을 몇 해 앞두고 암에 걸려 생의 종착점에 섰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스토너의 인생은 실패작에 불과한가. 

애초에 이 질문이 성립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 누군가가 이룬 사회적 결실의 성패를 두고 그의 삶을 평가할 수 있을까. 혹은 불가항력의 사건, 사고가 한 사람의 행, 불행을 결정할 수 있을까. 인생이란 우연의 연속과 그에 대응하는 인간 의지의 총합이다. 인생의 중요한 고비에 선 인간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에 맞서야 하는가. 소설 ‘스토너’는 평범한 인간이 삶이라는 풍랑의 파고에 때로는 몸을 맡기고 때로는 온몸으로 맞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스토너가 삶을 대하는 기본 자세는 ‘받아들이기’다. 대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농사를 지었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기질이다. 그의 부모는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토너의 ‘받아들이기’란 부모의 그것과는 다르다. 맹목적 순응, 나약한 굴종과도 거리가 멀다. 타인을 대하는 스토너의 태도는 언뜻 무기력해보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연재해를 받아들이듯 부인의 횡포와 히스테리를 고스란히 감당한다. 사랑하는 딸 그레이스가 알콜 중독에 빠졌을 때, 스토너는 그녀가 ‘술에라도 의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한다. 스토너는 타인과 자신의 경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는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 타인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주체는 그들 자신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가치관과 직결된 문제에서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강단과 학문을 오염시키려는 자들 앞에 스토너는 뚝심있게 맞선다. 학과장 로맥스는 그가 지도하는 학생 워커를 편애한다. 그 역시 로맥스처럼 신체에 장애가 있을 뿐 아니라, 독특한 재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토너는 그가 박사 과정을 이수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의 장애 때문이 아니다. 학문을 대하는 태도와 기본기, 인품, 도덕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로맥스는 스토너가 반대하는 이유를 소수자에 대한 차별로 몰아세운다.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하면 사안의 본질은 뒤로 물러나버린다. 뒤틀린 것은 어쩌면 로맥스와 워커의 신체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소신을 지킨 죄로 스토너는 결국 평생 승진하지 못하고 조교수로 남게 된다. 

스토너의 열정은 타오르는 불꽃이라기보다는 뭉근하지만 꺼지지 않는 잔불에 가깝다. 스토너가 가장 많은 열정을 준 대상은 학문이다. 스토너는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던 어린 시절 이후 평생 대학에 머무른다. 스토너에게 대학은 ‘보호 시설’이자 ‘교화 시설’이다. 현실과 유리된 그곳은 ‘환자, 노인, 불평분자, 그 밖의 무능력자’들을 위한 곳이다. 순수 학문이라는 이상향에서 스토너는 그들이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돕는다. 스토너에게 있어 ‘대학이라는 기관은 선의 도구’이기도 하다. 스토너는 그 자신이 경험했듯, 학생들이 학문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하리라 믿는 이상주의자다.   

처음으로 스토너가 열정을 주었던 아내 이디스는 그에게서 받은 열정을 돌려주지 않는다.  스토너와의 결혼은 그녀에게 원가족에게서 탈출하기 위한 도피처에 불과했다. 타인과 애정을 주고받는 법을 배우지 못한 이디스는 그녀가 알던 방식으로만 가족을 대한다. 결국 그녀의 상처는 고스란히 대물림된다. 딸 그레이스는 이디스처럼 성급한 결혼이란 방식으로 가족에게서 탈출한다. 

스토너는 중년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사랑에 대해 알게 된다. 그에게 지금껏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며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무언가였다. 그러나 캐서린과 주고받는 사랑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다. 일과 사랑의 완전한 조화 속에서 스토너는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매일 매일이 소중하고 애틋하며 오롯한 사랑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 스토너는 이별을 받아들인다. 캐서린과 스토너에게 그들의 정체성은 오직 강단에 있을 때에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잃은 그들의 사랑은 곧 공허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스토너는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스토너는 열정을 부었던 사람들을 잃게 된다. 오직 학문의 세계만이 스토너의 열정을 받아들이고 그 열정에 보답한다. 

‘그는 방식이 좀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중략)……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죽음은 갑자기 스토너를 찾아온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대개 그렇듯, 스토너도 그동안의 삶을 반추한다. 후회와 아쉬움, 실패의 기억이 그를 괴롭힌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그러나 한 친구는 너무 일찍 스토너를 등졌고, 이제는 그가 남은 친구를 두고 떠나는 자리에 섰다. 그는 이디스에게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에는 실패했다. 일상의 시시한 일들 때문에 학문에 열정을 더 쏟아붓지 못한 일, 더 훌륭한 교사가 되지 못한 일 등 그의 인생은 후회 투성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스토너는 그런 실패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와 성취, 사랑과 증오, 기쁨과 슬픔, 기회와 상실은 짝패와 같다. 그는 오래 전에 그가 쓴 책을 펼쳐본다. 딱히 주목받지 못한 낡고 잊혀진 책은 스토너를 닮았다. 그러나 그의 정체성은 그 책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정말로 그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생을 긍정하며 생을 마감한다. 그는 이 땅에 살다 갔고 무언가에 열정을 주었으며, 일생을 걸고 그가 믿는 것을 지켰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소설의 어조는 시종일관 담담하다. 빠른 전개도 굵직한 사건도 없다. 소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있음직하고 누구나 고민해볼 법하다.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처럼 살아간다. 우연한 사건으로 인생이 바뀌고, 보답받지 못한 사랑에 슬퍼하며, 부조리한 세상사에 울분을 느낀다. 그러나 스토너는 은근과 끈기, 꾸준함을 통해 자신의 열정을 쏟아붓는다. 그가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용감한 사람이기도 하다. 위대한 보통 사람, 그가 바로 스토너다. 

소설 ‘스토너’는 1965년에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잊혀졌으나 50년만에 재발행되어 베스트셀러 코너를 역주행한다. 저자 존 윌리엄스가 세상을 떠난지 20년 만의 일이다. 여러 모로 이 책의 운명은 주인공 스토너를 닮았다. 주목받지 못했던 소설의 진가를 눈밝은 독자들이 알아본 것이다. 저자 존 윌리엄스는 1922년 미국 텍사스 클락스빌에서 태어났다. 1942년에 미국 공군 소속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덴버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주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품으로는 ‘오직 밤뿐인’, ‘도살자의 건널목’, ‘아우구스투스’ 등이 있다. 새로운 소설을 집필하다가 1994년 사망한다.(김승옥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20, 원제 : STONER)

이수정 작가
이수정 작가

[이수정 작가]
1973년산. 이화여대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에서 수학했다.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일러스트레이터와 카투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때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소설 쓰기보다 읽고 분석하고 소개하는 일에 더 재능이 있음을 깨달은 행복한 서평가이자 독서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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