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이수정의 아름서재] 누군가를 향한 사랑에는 간혹 그 대상이 원치 않는 감정이 끼어들곤 한다. 무방비하게 욕망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어쩌면 모든 사랑은 폭력을 내포할지도 모른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소설 ‘이블 아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뒤틀리고 굴절된 사랑에 고통 받는다. 

질투와 소유욕, 광기, 폭력으로 얼룩진 그들의 관계는 이미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 달콤하던 과거는 온데간데없다. 어제의 연인이 전혀 알 수 없는 타인으로 탈바꿈한다. 사랑이란 외피를 뒤집어쓴 폭력은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 육체적 감각마저 의심하게 한다. 안온했던 가정은 내 약점을 훤히 아는 적과 동침하는 조용한 전장(戰場)이 된다. 외부의 시선에서 분리된 그곳에서 일어나는 범죄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탈주할 방법은 또 다른 폭력을 동원하는 것뿐이다. 

네 편의 중편 소설로 구성된 ‘이블 아이’에서 맞닥뜨린 불편한 진실에 어떤 독자는 진저리를 칠지도 모른다. 어떤 독자는 소설 속에서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슬프게도 우리가 맺는 관계들 중, 일부는 서로를 망치며 몰락하게 하는 ‘독성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블 아이’ 표지와 저자 조이스 캐럴 오츠
‘이블 아이’ 표지와 저자 조이스 캐럴 오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젊고 이지적이지만, 동시에 연약하고 불안정한 자아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여성으로서의 매력에 자신이 없거나, 어릴 때 겪은 트라우마 때문에 성행위를 거부한다. 혹은 남편과의 관계 때문에 자식의 문제를 외면한다. 사회적 지위와 연륜을 갖춘 남성들이 그들의 구원자로 나선다. 그러나 그들은 곧 치유를 가장해 그들에게 접근한 남성에게 지배당한다. 소설 속 여성들 역시 그저 무기력한 피해자로 남지 않는다. 그들은 치밀한 복수를 실행하거나 범행의 공범이 되기도 하며, 때로 가해자로 거듭난다. 

표제작 ‘이블 아이’에 등장하는 마리아나는 섣부른 결혼을 후회한다. 남편 오스틴은 명예와 권력을 갖춘 문화계 명사다. 마리아나는 결혼 이후 몰라보게 변한 오스틴의 태도에 경악한다. ‘친밀한 사생활, 결혼이라는 물리적으로 밀착된 친밀감 안에서 또 다른 오스틴이 자라나는 것’처럼 느낀다. 페르소나를 벗어던진 오스틴의 실체는 마리아나에게 가스라이팅을 일삼는 나르시시스트일 뿐이다. ‘흉한 가면은 그들의 내적 자아를 드러내고, 자정이 되어 가면을 벗은 얼굴에는 흉한 가면이 각인되어 있다’라는 분석은 오스틴에게 걸맞다. 

‘문화적인 면, 정치적인 면, 미학적인 면, 도덕적인 면’ 등 오스틴이 속한 거대 담론의 세계에서 그와 마리아나와의 관계는 단순히 사적인 관계에 불과하다. 마리아나는 자신이 ‘x가 상수인 방정식에서 변수 y’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관계는 사랑하는 두 사람만이 가진 특별함이 부재한다. 마리아나는 그저 아내의 자리에 놓인 기호에 불과하며 대체 가능한 무엇이다. 마리아나가 나이 차가 많은 남편의 넷째 아내라는 설정은 설화 ‘푸른 수염’을 연상하게 한다. 마리아나는 오스틴의 전처들이 그에게서 도망친 이유를 깨닫는다. 그러나 불안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마리아나에게는 ‘어디서 살고, 누구와 있고, 버려지지 않고, 외롭지 않다는 사실만 중요’하다.

‘남자들이 거의 다 그렇듯 그는 광기를 위장할 수 있고, 그래서 여자들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게 되는 거예요.’-본문 77쪽

오스틴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그녀에게 제시하는 사람은 엉뚱하게도 그의 첫 번째 아내다.‘이블 아이’는 악의적으로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저주를 거는 마력을 지닌 눈빛을 일컫는다.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눈빛, 더없는 혐오감을 드러내는’ 남편의 눈빛은 화초를 시들게 하고 마리아나의 생명력을 빼앗는다. ‘이블 아이’는 주술적 힘이 아닌 물리적 실체를 지녔다. 마리아나는 그제야 피해자들이 입은 깊은 상처를, 상처의 고리를 끊을 힘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는다. 

‘아주 가까이 아무 때나 언제나’에 등장하는 리즈베스는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다. 인기 없는 사춘기 소녀는 믿을 수 없이 매혹적이고 신비한 데즈먼드를 거부할 수 없다. 근사한 데즈먼드의 외양 너머 진실을 꿰뚫는 사람은 리즈베스의 언니 크리스틴뿐이다. 리즈베스의 어머니와 달리 크리스틴은 동년배의 날카로운 눈으로 데즈먼드의 실체를 파악한다. 리즈베스 역시 점점 그녀에게 집착하는 데즈먼드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데즈먼드는 이제 자신을 피하는 리즈베스를 스토킹하기에 이른다. 달콤한 풋사랑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바뀌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결말에서 밝혀진 데즈먼드의 정체는 독자를 경악하게 한다. 지독한 광기가 남긴 상흔은 오래도록 그 대상을 고통스럽게 한다. 리즈베스의 예전 삶은 뿌리째 뽑혔다. 리즈베스는 살충제에서 살아남은 말벌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궁금해한다. 벌의 몸통에 스며든 살충제처럼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리즈베스는 받아들인다. 

‘처단’은 실제 미국에서 일어났던 범죄에서 모티프를 얻은 소설이다. 이 책에 실린 다른 중편과는 달리 가해자 바트의 시각으로 서술한 범행 일지이기도 하다. 사이코패스 아들이 저지른 패륜 범죄를 감춰준 어머니의 사랑은 과연 아가페적이고 고귀한 것일까. 그녀의 욕망은 이 끔찍한 상황에서도 가족의 문제를 은폐하고 가정의 붕괴를 막으려는 것이다. 자신의 손에 불구가 된 어머니와 늘 함께 있게 된 바트는 여전히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기괴한 모자가 함께 병원을 찾는 마지막 장면은 ‘피에타의 반대 풍경’을 연상하게 한다. 

‘플랫 배드’에 등장하는 세실리아는 어릴 때 추행당한 경험으로 섹스에 거부감을 가진다. 놀랍게도 어린 세실리아를 추행한 범인은 그녀의 할아버지다. 유력한 가문 출신의 존경받는 사회 명사인 그는 어떤 의심도 받지 않는다. 그루밍 범죄의 희생양 세실리아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지만, 그녀의 육체는 정직해서 ‘몸의 모든 분자가 안돼 안돼 안돼 하며 몸부림’친다. 

‘남자를 향한 욕망으로 소리지르는 것 같던, 정말 살아 있고 정말 갈망하는 것 같던 그녀의 성기는 주먹 쥐듯 오므라들고 말았다.’-254쪽

그녀가 침묵하는 이유는 그녀의 고백이 불러일으킬 파장 때문이다. 가족 중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없으며, 그들은 앞으로도 진실을 알고 싶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세실리아는 비밀을 간직한 사람들이 내뱉은 고백이 그의 정체성 중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남들의 마음에서 그 사람이 당한 일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그와 섞여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피해자도 자신의 정체성을 단지 그가 입은 피해만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다. 

세실리아의 새로운 연인 N은 다른 남성과 달리 참을성을 가지고 세실리아를 대한다. N은 날카로운 눈으로 세실리아의 유년기에 있었던 사건을 간파하기도 한다. 마침내 세실리아와 N은 그녀의 할아버지에게 통쾌한 복수를 마친다. ‘할아버지의 뇌 속으로 피가 스며드는 모습’과 세실리아가 느끼는 성적 쾌감이 오버랩한다. 그러나 세실리아를 향한 N의 소유욕과 그가 드러낸 폭력성은 세실리아 앞에 놓인 또 다른 예속을 암시한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다른 작품처럼 ‘이블 아이’는 잔혹한 살인, 복수 등 피비린내를 풍기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약물 남용과 폭력적 대중문화, 아동 성범죄 등, 현대사회의 병폐 역시 여과 없이 드러낸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화자들은 가해자를 원망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느끼며 그런 양가감정에 괴로워한다. 저자는 그들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은 정상이며, 이 지독한 세상을 견디려면 함께 미칠 수밖에 없다고 속삭인다. 

가해자들의 범죄는 교묘하고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피해자들 역시 제도적 해결이 아닌 완전범죄를 통해 가해자에게 사적으로 보복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간간이 무너지며, 그들의 피폐해진 정신세계는 악몽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블 아이’는 인간관계 뒤에 숨겨진 복잡미묘한 힘의 논리와 병리적 감정을 섬뜩하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삶이 무기력하고 불안해서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을 때, 사악한 눈빛을 지닌 타자가 우리를 지배한다.   

현대 미국 문학의 대표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는 1938년 뉴욕주 록포트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 때 할머니에게서 받은 타자기로 소설을 쓰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시러큐스 대학과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1964년 첫 장편소설 ‘아찔한 추락’을 발표한 이후 지금껏 50편이 넘는 장편과 1000여 편의 단편을 선보였다. 시, 산문, 비평, 희곡 등 많은 문학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주요 작품으로 ‘좀비’, ‘이야기들’, ‘블론드’, 악몽‘ 등이 있다. 매년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노작가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군상에 대해 여전히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다.(공경희 옮김, 포레, 2015, 원제: evil eye)

이수정 작가
이수정 작가

[이수정 작가]
1973년산. 이화여대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에서 수학했다.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일러스트레이터와 카투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때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소설 쓰기보다 읽고 분석하고 소개하는 일에 더 재능이 있음을 깨달은 행복한 서평가이자 독서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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