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그대 너머에’(박홍민 감독)는 기억, 존재, 불공평 등에 대한 매우 독특한 판타지 미스터리 예술 영화이다. 중년의 영화감독 경호(김권후)는 자신의 이야기를 쓴 시나리오를 친한 형인 영화 제작자에게 건네지만 “재미없다.”라는 반응만 얻는다. 시나리오 작가를 만나 각본을 의뢰하지만 역시 퇴짜.

그는 대학 시절 친구였던 인숙(오민애)의 딸 지연(윤혜리)의 연락을 받고 만난다. 지연은 그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냐고 묻지만 그는 강력하게 부정한다. 하지만 그는 지연의 뒤를 따라간다. 인숙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 기억이 점점 사라져 지연은 못 알아보지만 경호는 한눈에 알아본다.

그 이후로 지연이 경호의 집을 찾아오는가 하면 우연히 지연을 만난 경호가 그녀를 쫓아가 결국 집안에 들어간다. 인숙은 깊은 잠에 빠졌고, 지연은 경호에게 자신처럼 인숙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는데. 특수 효과나 CG는 거의 없지만 관객의 심리를 자극하는 매력은 매우 풍부하다.

인숙은 지연이 어린 시절 자신의 부주의로 잠깐 잃었던 트라우마 때문에 그녀를 찾아 헤매지만 정작 눈앞의 지연은 남으로 인식한다. 경호는 녹록지 못한 자신의 현실을 시나리오에 녹여 내지만 한 개인의 한풀이일 뿐 상품성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과연 친한 형이 말하는 재미있는 시나리오란 무엇일까?

지연은 인숙의 기억 속에서 자신은 사라졌지만 경호만큼은 명징하게 살아남아 있는 게 서글프다. 옛친구 혹은 첫 사랑은 기억하면서도 하나뿐인 피붙이는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 중첩됨에 따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론까지 들 정도이다.

이 영화의 재미는 ‘과연 경호가 지연의 친부일까? 아니라면 친부는 누구일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경호를 둘러싼 지연과 인숙의 판타지적인 시퀀스들이 켜켜이 쌓여 가며 세 사람의 존재, 혹은 정체에 대한 의구심이 미스터리 장르의 흥미로움으로 발전해 간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환자의 대부분은 추억 때문에 고통받는다.”라고 말했다. 인숙은 의외로 젊은 나이에 치매에 걸렸다. 그 이유는 아름다운 추억과 아픈 기억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한 고통이 억압이라는 방어 기제로 작동해 알츠하이머 증세가 온 게 아닐까?

그녀는 평소에 지연의 귀가 닳도록 경호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경호가 지연의 친부이냐, 아니냐의 여부를 떠나 지연이 경호를 친부라고 강력하게 믿을 만한 근거가 될 정도로 인숙은 경호와의 추억에 집착했던 것이다.

그러한 방어 기제는 오히려 인숙의 기억과 시야에서 유일한 피붙이인 지연의 존재와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부정으로 작용했다. 물론 그 근원에는 지연이 어렸을 때 자신의 부주의로 그녀를 잃었던 데 대한 죄악감에 대한 억제 작용이 있기는 했을 것이다.

기억이란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기억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의도적으로 끄집어 낼 수 있는 게 있는 반면 무의식중에 저도 모르게 돌출되는 것도 있다. 또한 자꾸만 잊히는 아름다운 추억을 지워지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최신 기억의 장소로 이동시키려는 안간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혼돈의 내면세계가 인숙을 망각의 강 레테에 빠뜨린 게 아닐까? 경호는 과거, 현재, 미래 등의 시간과 자신의 집, 인숙의 집, 지연의 골목길 등 다양한 공간을 무시로 오간다. 또한 인숙과 지연의 기억 속을 헤집고 다니는가 하면 제3자가 되어 자신의 과거를 훑고 지나간다.

이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주장하는 시간성의 존재자와 일치한다. 다수는 흔히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명확하게 구분하고 따로 본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과거의 본래적 존재인 미래의 도래적 존재가 됨으로써 죽음을 극복한다.’라는 투의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경호는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과거와 미래를 오간다. 인트로와 아웃트로에서 개미를 보여 준다. 경호는 개미에 집착하는데 홀로 헤매는 개미를 놓고 친구를 잃어버렸다고 표현한다. 개미는 페로몬으로 대화를 나누기에 웬만한 거리나 상황이 아니면 동료를 잃을 일이 없다.

그런데 그 개미가 친구와 떨어져 방황한다는 설명은 바로 사회적으로 도외시된 경호를 의미한다. 그의 세 번째 시나리오는 친한 형에게마저 무시당한다. 이는 그가 오직 모든 종착역을 돈으로 귀결시키는 자본주의적 속물근성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걸 뜻한다. 그 누구보다 향기로운 페로몬을 지녔지만 정작 이 살벌한 정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제 감각은 뒤떨어졌다는 것이다.

경호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지연을 보고 “지연 씨.”라고 부른다. 지연은 이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무시한 채 빠르게 제 갈 길을 간다. 황급하게 그녀를 쫓는 경호는 이내 “지연아.”로 호칭이 바뀐다. 그런데 왜 골목길은 그렇게 좁고 미로처럼 복잡할까? 롱 케이크의 핸드헬드로 쫓는 골목길은 혼돈이다.

기억의 저장고는 두뇌이다.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자신의 두뇌의 지도를 그 누가 그릴 수 있을까? 그런 만큼 제 기억도 제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게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은 불공평하다. 이만큼 재미와 흥미를 갖췄고, 심도까지 심오한 독립영화라면 한국 영화의 미래는 밝다. 마지막 반전을 즐길 것! 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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