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베어’, ‘연인’의 장 자크 아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아트 무비 감독이다. 그런데 ‘에너미 앳 더 게이트’(2001)는 그의 이전 작품과는 달리 커다란 재미를 선사하는 상업 영화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가을. 나치는 유럽 대륙을 유린한 뒤 미국 동맹국인 소련의 마지막 보루 스탈린그라드를 침공한다.

기세등등한 독일군의 파상 공세는 전쟁 물자까지 부족한 소련군을 파죽지세로 짓밟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소련군 정치 장교 다닐로프(조셉 파인즈)는 선전 전단을 뿌리기 위하여 전장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가 병사 바실리(쥬드 로)의 기막힌 사격 솜씨를 목격한 뒤 그의 기사를 군대 신문 1면에 싣는다.

벼랑 끝에 몰려 있던 소련군의 사기는 바실리로 인해 다시 올라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한다. 바실리는 적의 장교들을 정교한 사격 솜씨로 제거하면서 영웅으로 부상한다. 바실리와 다닐로프는 필리포프와 사샤 모자의 집에 초대되었다가 그들의 친구인 여군 타냐(레이첼 와이즈)를 보고 동시에 반한다.

독일군의 사기가 떨어지자 나치는 사격 학교 교관 출신의 백전노장 쾨니히(에드 해리스) 소령을 전선에 내보내 바실리를 암살하고자 한다. 스탈린은 마지막 방어지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현지에 새 책임자로 흐루쇼프(밥 호스킨스)를 파견한다.

쾨니히의 등장으로 바짝 긴장한 흐루쇼프는 다닐로프에게 바실리로 하여금 하루빨리 쾨니히를 제거하도록 재촉하라고 명령한다. 바실리는 다닐로프에게 쾨니히가 자신보다 훨씬 영악하기 때문에 이길 수 없다고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 바실리와 타냐는 연인 관계가 되고, 다닐로프는 바실리를 질투한다.

쾨니히는 초콜릿 등 각종 고급 음식으로 사샤를 포섭하는 데 성공해 바실리의 동선과 은닉처 등을 알아내는데. 바실리 자이체프는 실존 인물로 아직도 러시아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타냐와 쾨니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저 영화적 재미를 즐기기에 각색에 무리는 없어 보인다.

소련군이 볼가강을 건너 스탈린그라드에 상륙하는 인트로는 스케일을 자랑하는 전쟁 영화의 명장면 목록에 포함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스펙터클하고 현사실적이다. 특히 감독은 시가전 때 소련군 2명당 총 1정씩 배급하는 시퀀스를 통해 당시 소련군이 얼마나 불리한 상황이었는지 알려 준다.

스탈린그라드는 로케이션도 중요했지만 지도자의 이름을 딴 도시인만큼 상징성에 있어서도 최후의 보루였다. 이 영화는 인식론적으로 유물론을 무시하고 관념론의 손을 들어 준다. 군사력에 있어서 형편없는 소련군이 패배 직전의 위기 상황에서 바실리라는 영웅 한 명 때문에 부활하는 게 관념론의 극치.

전쟁은 작전도 중요하지만 일단 무기, 군인, 식량 등이 풍부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유물론적 조건에서 뒤처져 있던 소련군이 반등하는 계기는 바로 다닐로프가 만든 영웅 바실리였다. 연일 신문 1면에 실리는 그의 활약상은 패배주의에 물들어 사기가 떨어져 있던 군인과 국민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것이다.

스탈린그라드의 상징적 의미를 강조하는 흐루쇼프의 발언 역시 지극히 관념론적이다. 중반 이후 시가지 은닉처에 은신한 채 상대방을 허점만을 노리는 바실리와 쾨니히의 대결은 이 영화의 백미이다. 아노 감독이 진작 상업 영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면 어떠했을지 큰 기대감마저 들 정도이다.

감독은 프랑스인이다. 객관적 시각에서 나치는 빌런이지만 프랑스인 입장에서도 독일은 밉고 소련은 상대적으로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슬쩍 끼워 넣는 센스도 발휘하고 있다. 스탈린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며 군인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흐루쇼프가 그런 의미이다.

타냐가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했다는 설정, 바실리의 동료 스나이퍼 한 명이 전쟁 전 독일에 유학, 쾨니히에게 사격술을 배웠다는 설정 등도 내용이 있다. 전쟁은 이전의 모든 상황을 무시하게 만든다. 마르크스를 배출한 독일은 오히려 나치의 파시즘 국가가 되었고, 제정 러시아는 공산주의 국가로 변했다.

그래서 “이건(이 전쟁은) 계급투쟁의 정수이다.”라는 대사가 있다. 나치가 이기는 순간 전 세계는 새로운 형태의 왕정 복고로 돌아가 독재 정치의 시대를 맞을 것이다. 당시의 소련 국민과 군인은 최소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다닐로프는 타냐의 서재에서 적지 않은 독일 문학 서적들을 발견한다. 독어 전공이니 지극히 당연할 터. 그는 “괴테와 실러의 책이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면 어떨까?”라고 묻고, 타냐는 “마르크스도 있다.”라고 재치 있게 받아친다. 어쨌든 소련은 마르크스를 신봉하는 공산주의 국가였으니까.

소련에 대한 비판은 계속된다. 바실리는 다닐로프와 타냐 같은 지식인들이 살아남아 나라의 뒷일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고, 타냐는 전쟁이 끝나면 뭘 하고 싶냐고 묻는다. 바실리는 어릴 때 공장에서 노동자를 관리하는 사람을 봤는데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며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답한다.

마르크스가 주창한 공산주의는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모든 국민이 공평하게 일하고, 평등하게 사는 사회였다. 그러나 소련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스탈린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에 먹칠을 하고 독재로 개인의 야망을 펼쳤을 따름이다. “풍요와 빈곤은 늘 존재할 것.”이라는 대사가 의미심장하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