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액션의 새 지평을 열었음과 동시에 가장 철학적인 영화의 기준이 된 ‘매트릭스’ 트릴로지(워쇼스키 자매 감독)의 속편인 ‘매트릭스: 리저렉션’(라나 워쇼스키 감독)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트릴로지 마니아들에게는 반가운 만큼 실망스럽고, 못 본 관객이라면 지나치게 난해해 접근이 쉽지 않다.

트릴로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기계 신)가 인류를 정복해 인공 자궁(매트릭스)에 가둬 놓고 사육하며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시대. 데우스는 인류의 의식을 가상 세계에 놓고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는 듯 착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일부 자각한 인간들이 탈출해 시온이라는 은신처에서 생활하고 있다.

시온인들은 오라클(신탁)의 메시아(네오)가 나타나 인류를 구원해 준다는 전설을 믿고 산다. 모피어스(꿈의 신)와 트리니티(삼위일체)가 해커인 앤더슨이 바로 네오임을 확신하고 탈출시킨다. 네오는 데우스에게 프로그램인 스미스 요원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며 평화를 협상, 인류를 구해주고 희생된다.

‘리저렉션’. 기계 세계에 내란이 생겨 대규모 숙청이 이뤄지고, 새로 권력을 잡은 애널리스트(닐 패트릭 해리스)는 매트릭스 대신 모달이라는 새 프로그램으로써 인류를 지배한다. 네오(키아누 리브스)와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가 모달의 에너지원으로써 필수이기에 되살려 인공 자궁에 가두어 놓고 있다.

CEO 스미스가 운영하는 데우스 마키나라는 비디오 게임 회사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는 앤더슨. 그는 ‘매트릭스’ 3편을 제작해 성공했다. 투자사 워너 브라더스가 4편을 제작하자고 제안해 스트레스를 받아 정신과 의사 애널리스트에게 치료를 받으며 매일 파란약을 복용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가 하면 수시로 알지 못할 기억과 환상에 시달리고 있다. 어느 날 단골 카페 시뮬라떼(시뮬라시옹,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에서 티파니라는 이름으로 남편과 세 아들과 사는 주부 트리니티를 만나지만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전혀 낯설지 않아 혼란스럽다.

인류는 니오베(교만) 장군이 지도하는 새 안식처 이오(제우스가 사랑했기에 헤라가 질투해 흰 암소로 변한 여인. 입출력)에서 살고 있다. 므네모시네(기억의 신)호 선장 벅스(제시카 헨윅)가 니오베의 허락 없이 모달에 침투했다 요원들에게 발각되어 쫓길 때 웬일인지 스미스 요원이라는 자가 구해준다.

그는 바로 프로그램으로 재생된 모피어스였다. 벅스는 자살하려던 앤더슨을 구해 모피어스에게 데려간다. 그들에 의해 모든 진실을 깨닫게 된 네오는 사랑하는 트리니티를 구하기 위해 빨간약을 선택하는데. 트릴로지를 봤더라도 새로운 디지털 용어는 물론 낯선 고유 명사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릿 타임(극단적으로 시공간을 재구성해 일반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장면들을 볼 수 있을 만큼 느린 슬로 모션으로 구현하는 특수 시각 효과)과 타임 슬라이스 포토그래피( 원래의 촬영 시간보다 더 긴 재현 시간을 낳는 슬로 모션 효과) 등 ‘매트릭스’의 전매특허는 여전히 반갑다.

네오가 손으로 총탄을 막고, 애널리스트가 트리니티를 향해 총을 쏠 때 시간이 느리게 되는 쇼트 등이다. 그런데 거기까지가 전부. 리브스는 ‘존 윅’ 트릴로지를 통해 액션이 더욱 발전했지만 다른 배우들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리브스가 네오인지 존 윅인지 헷갈린다는 게 결정적 핸디캡.

트릴로지가 워낙 철학의 집대성이었던 것은 유명하다. 가장 큰 메시지는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대체물), 그리고 기계 문명에 대한 경고이다. 그런 메시지는 여전하다. 장자의 호접몽처럼, 플라톤의 침대나 동굴처럼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해 잘 모른다. ‘통 속의 뇌’일 수도.

그건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주의이다. 앤더슨은 성취욕을 느끼는 평안한 행복의 가상 세계에서 벗어나 고난의 진실 세계에 갈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해 고뇌한다. 우리는 현재의 일상생활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심지어 부정을 하면서 진실을 찾고자 하는 회의론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를 묻는다.

감독이 결국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다. 앤더슨이 네오가 되기로 결심하는 동인은 딱 하나, 트리니티를 살려 사랑을 되찾는다는 것이다. 허상을 깨고 인류를 구원한다는 원대한 메시아사상을 펼쳤던 트릴로지의 네오에 비교하면 허망하지만 감독의 ‘최고선은 사랑.’이라는 주장을 부인하기도 쉽지 않다.

트릴로지에 더한 살짝 다른 철학은 이항대립이다. 트릴로지의 기계 문명에 대한 비판을 그런 식으로 달리 표현했다. 그래서 binary(이진법)라는 미장센을 대놓고 노출하는가 하면 대사 속에서 수시로 ‘자유의지’와 ‘운명’으로 드러낸다. 사르트르는 우리네 삶을 ‘B와 D 사이의 C이다.’라고 주장했다.

Birth(탄생)과 Death(죽음) 사이에서의 연속적인 Choice(선택)이라는 말이다. 그런 자유의지가 우리 인생을 결정한다는 목적론인데 현실에는 의외로 운명론자(결정론자, 기계론자)도 많다. 특히 특정 종교는 신이 미리 모든 것을 조화롭게 설계해 놓았고, 사후 세계마저 관장한다는 극단의 결정론을 펼친다.

하지만 감독은 대놓고 목적론을 설파한다. 자유로운 의지로써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지배에서 벗어나 인생을 개척해 나아가라는. 그래서 “자아에 대해 보면 볼수록 많이 알아낸다. 진짜를 모르면 존재 자체가 없다. 루프 안에서 반복되는 진짜 세상이 아닌 걸 깨달아라.”라고 외친다.

인간과 기계라는 대립쌍 역시 전형적인 이항대립. 라파예트는 혁명가, 셰퍼드는 안내자, 셈블런스는 겉모습, 칼리오페는 예술의 여신 무사이(뮤즈) 중 서사시의 여신이다. 열쇠와 도스 컴퓨터의 미장센, 라푼젤 탑, 트릴로지의 느부갓네살(유대인 유수의 바빌론 왕)호가 므네모시네로 교체된 것 등은 애교 혹은 유머? 상영 중.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