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최철호 소장
저자 :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최철호 소장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최철호 소장의 한양도성 테마여행 가이드

600여 년의 역사를 품은 한양도성 안에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기까지의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최철호 소장은 그 속에 숨은 이야기를 찾기 위해 매일 성곽길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현재 한양도성 역사기행 가이드로도 활동 중인 저자의 생동감 있는 설명과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100여 점의 사진을 함께 실었다. 이 책에서는 한양도성을 따라 가볼 수 있는 서울의 역사 여행지를 6가지 테마로 나누어 소개한다. 한양도성 경계를 결정지은 인왕산 선바위부터 한반도의 중심 목멱산까지 도성을 품고 있는 4개의 산줄기 따라 내사산 여행을 떠나보고, 조선 왕조의 건국과 망국까지 모두 만날 수 있는 추모의 길도 걸어본다. 사대문과 사소문 따라 서울을 한 바퀴 돌아보면 발길 닿는 곳곳마다 유적지이며, 동네 이름의 유래도 역사와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출판사 서평-서울의 잃어버린 이름들을 찾아서

이름은 정체성이다. 이름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정체성을 잃는 것과 다름없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창씨개명을 실시한 이유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잊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서울 곳곳에는 옛 문화와 뒤섞여 있는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일상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남산, 장충단공원 등 우리가 무심코 부르는 명칭 속에도 일제로 인해 잃어버린 우리 고유의 이름들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다. 남산의 원래 이름이 목멱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N타워가 있는 남산은 본래 소나무가 많아 목멱산(木覓山)이었으나 일제는 산의 역사적 의미를 지우고 단순화 시켰다. 남산은 그저 ‘남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또한 영산(靈山) 목멱산에 있던 목멱산신을 모신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겨버리고 조선신궁(남산신사)을 지어 신사의 격을 최상으로 올렸다. 현재 우리에게는 목멱산보다 남산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는 것은 가슴 아픈 현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관된 기조로 사라진 서울의 이름들을 되찾아 부르자고 말한다. 본문에도 본래 명칭들을 살려 실었다.

역사적 정체성 회복을 위한 한양도성 성곽길 여행

18.627km 한양도성에는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다. 도성을 쌓기 위해 전국의 중인, 농민 197,000여 명이 동원되었고, 고된 노역으로 다치고 숨진 사람도 많았다. 수많은 백성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성돌에는 그들의 이름이 실제로 새겨져 있다. 한양도성은 180m씩 나누어 책임자를 두었는데 그 공사 책임자의 이름을 알 수 있도록 이름을 새긴 것이다. 성곽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각자성석(刻字城石)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렇게 힘겹게 쌓은 한양도성은 일제에 의해 허무하게 손실되었다. 1914년에는 서소문을 없앴고, 1915년에는 전차 노선 복선화로 돈의문마저 허물었다. 그 결과 성문과 성벽은 일부만 남고 사라졌다. 인의예지신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의 정신을 짓밟은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한양도성은 600여 년의 다난했던 역사를 지켜보며 살아남은 소중한 유물이다.

이 책은 여섯 가지 테마로 한양도성 성곽길 따라 서울 동네를 거닐며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짚어 본다. 외세에 맞서 싸웠던 위인들의 흔적과 이태원 부군당, 광통교 등 우리 고유의 문화가 깃든 장소, 겸재 정선의 그림터였던 수성동계곡과 참게잡이를 하던 용산팔경 만초천의 아름다운 풍경까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서울의 속살을 찾아 떠나본다.

한반도는 현재도 자유롭지 못하다. 임진왜란부터 6.25전쟁까지 청군, 일본군이 침략을 거듭해 왔고, 해방 후에는 미군이 머물며 서울의 중심을 금단의 땅으로 만들었다. 무력 앞에 굴복하고 말았지만 우리의 정신마저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보아야 할 때다. 지도에 여전히 용산(龍山)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충무공 이순신의 흔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저자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강대국에게 시달려 온 금단의 땅을 지나는 물줄기는 강이 되어 여전히 흐르고 있다. 경복궁의 금천, 인왕산의 계곡물 모두 서울의 심장을 관통하는 청계천으로 모여 조용히 흘러간다. 역사의 물길은 우리 곁에서 미래를 향해 함께 흐르고 있다. 한양도성과 성저십리까지 이어지는 서울기행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본문에서

한양도성 순성길 백악 구간은 한양도성에서 소실된 부분이 가장 적고, 오래된 성곽을 유지하고 있다. 도성 안을 걷다 보면 옛 조상을 만나듯 성벽에 새겨진 각자성석(刻字城石)을 만날 수 있다. 각자성석의 흔적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더듬어 성곽을 쌓은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도 들어보자. 각자의 시기별 특징과 구간별 축성 시기를 확인할 수 있으니 한양도성은 살아 있는 박물관임에 틀림없다. -p.30

목멱산 오르는 길에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고 쓰인 고종의 친필 비석도 보인다. 왜성대공원으로 문을 연 후 한양공원이 되었으나 곧 남산공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일제는 역사 속 목멱산을 남쪽의 산인 보통명사 남산(南山)으로 격하하고, 순환도로를 건설할 때 벚나무 600그루를 심어 ‘남산순환도로’라고 불렀다. 해방 후 목멱산에 뚫린 터널은 모두 남산터널로 불렀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원래 이름으로 불러 주어야 하지 않을까.

남산은 ‘목멱산’으로, 남산공원은 ‘한양공원’으로, 남산타워는 ‘목멱산 타워’로, 남산도서관은 ‘목멱산 도서관’으로 바꿔 주어야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목멱은 아침 해를 찬란히 비추어 줄 것 같다.

이름에는 역사가 묻어 있다. 용산공원이 새롭게 바뀌면 서울의 중심이자 한반도의 허브가 목멱산에서 한강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제 남산이 아닌 목멱산을 품어야 할 시간이다. -p.60

신문로는 한양도성 서쪽에 있는 길로 성곽길 중 가장 낮은 곳이다. 근처 언덕에 성문 터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돈의문(敦義門)이 있던 자리다. 돈의문은 소의문과 창의문 사이, 경운궁과 경희궁 사이에 있었던 성문인데 원래의 돈의문은 600여 년 전에 사직단 근처에 세워졌다. 처음 세워진 돈의문은 경복궁 서십자각 밖에 있었으나 경복궁의 지맥을 해친다 하여 폐쇄했다. 대신 인왕산 기슭 남쪽, 경희궁 서쪽 언덕에 서전문을 열었다. 하지만 세종은 한양도성을 대대적으로 고칠 때 서전문을 다시 닫고, 돈의문을 세웠다. 때문에 새로운 서쪽 대문을 ‘새 문’ 또는 ‘신문(新門)’으로 불렀다. 그래서 이 길의 이름이 ‘신문로’가 된 것이다.

돈의문은 한양도성의 서쪽 성문의 기능을 500년 넘게 해왔다. 특히 개항기에는 새로운 문물이 돈의문을 통해 전해졌다. 서양의 새로운 문화와 사람들이 외교의 거리이자 공사관 거리인 정동길을 오갔다. 그러다가 1915년 전차 노선이 복선화되면서 돈의문은 헐리고 만다. 그것도 205원 50전에 낙찰되어 돈의문은 역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새 문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문’이 되었다. 서대문구에 서대문이 없듯, 신문로에는 새로운 문이 없다. -p.64

백악산과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흘러내려온 물줄기는 삼계동천을 지나 자하계곡으로 흐르고, 자하계곡 물은 세검정천을 지나 홍제천으로 흐른다. 자하계곡은 계곡이 깊어서 아침 물안개가 피어난다. 겸재 정선의 <자하동>도 바로 이곳에서 비 그친 새벽에 그린 그림이다. ‘자하’는 부처님 몸속에서 나오는 보랏빛 금색 안개라는 뜻으로 새벽녘 물줄기에 비친 물안개가 자줏빛처럼 영롱하여 자하(紫霞)라고 불렀고, 자하문을 줄여 자문이라고도 했다. 자문 밖 풍경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고요하고 아름답다. 물소리와 물안개가 산 아래 보이는 듯하다. 골이 깊고 산이 많은 고려시대 개성에 자하동이 있었는데 한양으로 내려온 사람들에게 이곳이 개성의 자하동과 비슷해서 자핫골이라고 붙였다. 자핫골은 한양도성 밖 삼각산 아래 아름다운 동네 이름이었다. -p.72

그런데 소의문은 어디에 있을까? 소의문은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빌딩과 빌딩 숲 사이에 성벽만 남아 있다. 길 건너 배재학당 역사박물관과 대한상공회의소 성벽을 따라 걸어도 성문은 보이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서소문은 가장 먼저 없어졌다. 가슴 아픈 성문에 얽힌 이야기가 ‘서소문동(西小門洞)’에 있다. 소의문이 없는 서소문동은 정동과 태평동 사이에 있다.

소의문은 광희문처럼 도성 밖으로 상여가 나가는 소문, 시구문이라 했다. 서소문 밖 저잣거리였던 이곳은 중죄인을 처형하는 형장이었다. 특히 천주교 교인 44명이 처형된 후 가장 많은 성인과 목자가 배출된 최대 순교성지다. -p.102

만초천의 우측에 기와를 구웠던 와서와 제사용으로 키웠던 염소와 소를 관리하는 전생서 및 남단이 있던 둔지방이 있다. 미군기지 안에 있는 둔지방은 둔지미 마을이라는 넓은 마을이었다.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산 아래 있다. 71m 둔지산(屯芝山)은 목멱산 동봉에서 이태원 부군당을 거쳐 한강까지 내려와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 곳까지이다.

옛 둔지산에는 누가 살았을까? 김홍도의 스승이자 시·서·화 삼절로 널리 알려진 표암 강세황이 이곳에 살면서 글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둔지산 아래 정자를 짓고, 목멱산을 보며 삼각산의 가을 풍경도 담았다. 그림 속 만초천에 흐르는 물소리, 목멱산에서 나무 사이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를 그림에 담았다. -p.212

효창원은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효창원 안 만리창(萬里倉)에 야영과 숙영을 하며 군사기지로 사용했다. 강화도를 통해 서울로 향하는 유일한 뱃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효창원을 병참기지로 만들고, 구용산고지(舊龍山高地)라 하여 목멱산에서 둔지산까지 군영지로 바꾸어 버렸다. 1944년에는 문효세자의 묘를 고양 서삼릉으로 이장한 후 순환도로를 만들고 공원화했다. 효창원은 효창공원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사직단이 사직공원으로, 삼청단이 삼청공원으로, 장충단이 장충공원으로 격하되었다. -p.218

[저자 소개-최철호 소장]
-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유엔해비타트 한국위원회 사무차장
- (사)서울아리랑보존회 이사
-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자
-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저자
- <최철호 소장과 함께하는 우리동네 방방곡곡>, <한양도성 옛길> 칼럼니스트
-인스타그램 @sungguac_18.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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