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이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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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박창희의 건강한 삶을 위해] 작은 콩알만 한 알약을 매일 아침 한 알씩 먹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행위는 내가 고혈압 환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증상도 없는데 불의의 사고에 대비해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 가며 (아예 달력에 약 봉투를 주렁주렁 붙인 이들도 있다.) 약을 먹는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기존의 잘못된 생활 습관을 싹 바꾸면 어떻게 될까. 식습관 등 잘못된 행위를 뜯어고치는 것이 약의 효과에 견줄 바가 못 되는 것일까. 약은 그나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개과천선 의지를 송두리째 뽑아 버리고 만다. 한 달에 한 번씩 의사를 만나 처방전을 받고 약을 탄다. 그날 저녁에 이어지는 질탕한 술자리.

술에 덜 깬 채 아침에 일어나 '내가 왜 이럴까?'라고 자책하지만 잠시뿐 땅거미가 깔리면 또다시 어제 저녁의 반복이다.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로 삶을 변화시켜 나갈 순 없나. 당시 44살의 필자는 내게 혈압약을 권유한 의사에게 역제안했다. “술을 끊고 체중을 줄여 보는 것은 어떨까요?” 80kg을 넘나드는 체중과 술을 즐기는 습관이 늘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는 내 제안이 마뜩잖은 표정을 짓는다. 묵묵히 고개를 저은 의사가 딱하다는 듯 필자에게 들려준 일화는 다음과 같다. 약을 거부한 채 집으로 돌아간 고혈압 환자가 형광등을 갈기 위해 의자 위에 올라섰는데 그 순간 혈압이 올라 뒤로 쓰러져 죽었다는 것이다. 의사가 이 끔찍한 얘기를 생활 습관 개선을 통해 증상을 바꿔 보겠다는 예비 환자에게 들려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자신의 고객으로 만들기 위함인지, 또는 환자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해 준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잘못을 뉘우치는 자식에게 기꺼이 기회를 주는 부모의 마음과 의사의 마음은 확연히 다르다. 2000년대에 들어서 당뇨, 고혈압 등으로 대표되는 성인병이 청소년 시기로 확대되는 경향이 두드러지자 이를 생활 습관병으로 개칭해 부르도록 한 단체는 다름 아닌 대한내과협회이다.

그렇다면 의사 또는 병, 의원들은 단순히 약을 권유할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생활 습관을 개선하여 질환을 관리하도록 계몽할 의무나 책임을 갖는 사람들, 또는 단체가 아니겠는가. 의사는 늘 바쁘고 병원은 늘 분주하다. 그날도 오래 기다린 후 의사를 만났고 내 뒤에는 역시 많은 사람이 의사를 만나기 위해 줄 서 있다.

의사의 표정에서 내가 조속한 결정을 내리고 진료실에서 나갔으면 하는 느낌을 읽을 수 있었다. 순간 '절간에 와서 성경을 달라고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것은 나의 결정뿐이다. 처방전을 받고 약을 먹는 고혈압 환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형광등을 갈기 위해 집으로 갈 것인가. 필자는 집으로 가기로 했다.

형광등을 갈다 죽든, 백열등을 갈다 죽든, 멀쩡한 몸으로 고혈압 환자의 꼬리표를 단 채 정기적으로 의사 앞에 불려 오긴 싫었다. 자신의 의지로 혈압을 정상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일종의 오기였다. 일단 병원 문에 들어서면 병원의 방침과 의사의 지시에 순순히 따라야 한다.

의사 앞에 앉은 채 건강을 담보로 무모한 도박을 하기란 쉽지 않지만 약에 의존한 채 자신의 의지와 반하여 살아가긴 더더욱 싫었다. 치료를 거부하니 다른 검사를 받거나 처방전을 받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병원 문을 신속히 나갈 수 있고 비용도 덜 들어 좋다는 생각에 쓴 웃음이 나왔다.

세컨드 오피니언을 듣기 위해 몇 군데 병원을 전전했지만 대다수 의사의 반응은 비슷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그저 '약 드세요.'라는 메아리뿐이다. 시간과 병원비만 날린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고, 지친 필자는 더는 병원을 찾지 않기로 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들어간 식당에서 필자는 본태성 고혈압 판정을 받은 날을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과연 약을 먹지 않고도 형광등을 제대로 갈며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을 지닌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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