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무비&철학] 마블의 인해전술('어벤져스' 등)에 대한 DC의 반격의 신호탄인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잭 스나이더 감독, 2016)은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내용에 151분이란 러닝타임이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재미와 완성도를 자랑하지만 배트맨과 슈퍼맨을 굳이 죽도록 싸우게끔 만들 정도로 대담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는 않다.

결정적으로 ‘왓치맨’이란 히어로 무비 최고의 철학적 메시지를 만들어 낸 잭 스나이더 감독이란 이름값이 실망스럽다. 그러면 어쩌랴, 배트맨의 팬이든, 슈퍼맨의 팬이든, 아니면 히어로 무비에 열광하는 마니아건 무조건 필독서임은 분명한 것을.

스나이더는 전작 ‘맨 오브 스틸’에서 슈퍼맨을 리부트했다. 크립톤의 과학자 조의 아들로 태어난 칼이 왜 갓난아이 때 지구로 보내져 클락이란 이름의 지구인이 돼야 했는지를 보여 주고, 성장한 뒤 아버지의 원수 조드 장군과 지구를 담보로 한 일대 결전을 벌이는 과정을 웅장한 스펙터클로 그렸다.

조드는 칼을 내놓지 않으면 지구를 파괴하겠다고 미국 대통령을 겁박하고, 정부와 군대는 이에 응할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암암리에 국지적으로 지구 방어에 힘썼던 슈퍼맨의 손을 들어줄지 고민하지만 이내 조드가 어차피 지구를 파괴하고 여기에 새로운 크립톤을 건설할 것과 더불어 슈퍼맨이 없어진 크립톤 편이 아니라 지구 편임을 새삼 깨닫고 지구의 운명을 슈퍼맨에게 맡긴다.

동등한 능력을 지닌 조드를 천신만고 끝에 제압한 클락은 슈퍼맨이란 이름의 영웅이 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스나이더는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부하 여자 장교가 슈퍼맨이 섹시하다고 말하자 남자 상관은 한숨을 쉰다. 만약 저렇게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슈퍼맨이 적이라면?

그건 ‘배트맨 대 슈퍼맨’의 제작을 위한 밑밥이었다. 전작의 무대가 됐던 미국의 대도시는 여기선 메트로폴리스란 가상의 도시가 된다. 바로 강 건너 옆의 도시는 고담이다. 슈퍼맨(칼, 클락, 헨리 카빌)은 본의 아니게 조드와의 대결로 메트로폴리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브루스 웨인(배트맨, 벤 애플렉)은 어느덧 강도의 총에 맞아 죽은 아버지보다 더 늙었다. 외견상으로 보나 ‘배트맨’ 시리즈에 근거할 때 40대 중후반 정도이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그는 그래서인지 괜한 노파심에 애끓는다. 바로 슈퍼맨이 언젠가 독재자가 될 것이란 확신이다.

권력자는 결국 그 힘에 취해 타락함으로써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는 것. 반박하는 집사 알프레드(제레미 아이언스)에게 ‘고담에 선한 사람이 얼마나 남았느냐?’라며 자신의 논리를 확신한다. 아직도 눈앞에서 부모가 총에 맞아 죽는 꿈을 꾸고, 깊은 박쥐 동굴에 빠졌던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슈퍼맨과 조드의 전쟁 때 그의 웨인 그룹의 건물이 붕괴됐고, 당시 한 직원이 철골에 깔려 두 다리를 잃었다. 메트로폴리스에 괴짜 하나가 나타난다. 렉스 루터(제시 아이젠버그)라는 젊은 사업가인데 브루스는 직감적으로 그가 아프리카 지역의 테러의 배후임을 깨닫는다.

그건 클락도, 클락의 연인 로이스 레인(에이미 아담스) 데일리 플래닛 기자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로이스가 취재해 보니 국방부 역시 알고 있었지만 대놓고 규제할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 렉스는 교묘한 사업 수완을 발휘해 조드의 사체 및 우주선을 확보한 뒤 엄청난 음모를 꾸민다.

자신의 유전자와 크립톤의 첨단 공학을 이용해 조드를 엄청난 괴물 둠스데이로 되살리려 하는 것. 그 근거는 인도양 한 가운데에서 크립토나이트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안 렉스는 비밀리에 이를 사들여 운반하는데 정보에 관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브루스가 알아내고 탈취한다.

그 역시 슈퍼맨을 제거하고 싶었으니. 그는 이것으로 슈퍼맨을 무력화시키는 가스총과 아예 죽일 수 있는 창을 만든다. 슈퍼맨 역시 천방지축인 배트맨이 언젠가 인류에 큰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배트맨은 지난 작품들에서-특히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시리즈-항상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왔다.

 

그는 적을 상대할 때 총을 안 쓴다는 원칙은 지키지만 법은 잘 어겨 선의의 피해를 끼치고 피해자를 양산해 왔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정의이지만 과정의 불의의 피해 따윈 안중에 없다. 그래서 ‘다크나이트’ 시리즈에서 고담의 영웅이었던 하비 검사가 악당이 된 것이다.

슈퍼맨 역시 이 점에 주목한다. 영화는 철저하게 배트맨의 주관적 시각에서 전개된다. 다수의 관객은 ‘맨 오브 스틸’에서 엄청난 스케일에 집중하느라 미처 못 느꼈겠지만 사람이 아닌 신적인 존재 슈퍼맨과 조드가 싸우면서 도시 하나가 초토화됐다.

그렇다면 당연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데일리 플래닛의 여직원이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려 죽을 뻔한 장면이 삽입됐다. 슈퍼맨이야 지구와 지구인을 구하겠다는 대의명분으로 나선 것이지만 80억 명을 구하느라 본의 아니게 최소한 8만 명이 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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