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무비&철학] 일단 오락 영화로서의 값어치는 충분하다. ‘어벤져스’ 정도는 아니지만 최소한 향후 DC가 마블에게 어떤 반격을 펼칠지 즐거운 고민을 해도 될 만큼 블록버스터와 히어로 무비에 열광하는 마니아들은 물론 평범한 관객들에게조차도 반짝반짝 빛나는 마스터피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스나이더 감독의 장엄한 걸작 ‘왓치맨’에 비교하면 철학, 분위기, 메시지, 전편에 흐르는 주제, 조명, 미장센, 음악, 음향, 연출 등은 매우 아쉽다. ‘맨 오브 스틸’을 배트맨의 시각으로 푸는 가운데 우주의 헐크를 재미의 구원군으로 불러와 배트맨과 슈퍼맨을 연합케 하고 여기에 양념으로 원더우먼까지 가담시켰다고나 할까?

무엇보다 문제는 배트맨과 슈퍼맨이 서로를 적대시해야 했던 이유와 이를 해소하는 근거가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점과 배트맨이 슈퍼맨을 제압하는데 어김없이 크립토나이트가 등장했다는 클리셰이다. 첫 대결에서 슈퍼맨의 자비로 목숨을 구한 배트맨은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통해 드디어 슈퍼맨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지만 ‘마사를 구해달라.’라는 슈퍼맨의 애원에 살기를 거둔다.

마사는 죽은 브루스의 엄마의 이름이자 현재 렉스에게 볼모로 잡힌 슈퍼맨의 인간 엄마이기도 하다. 알프레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추종마저 외면하며, 그토록 슈퍼맨을 죽이고 싶었던 배트맨의 ‘정의’가 대의명분을 잃는다.

새롭게 추구하고자 하는 정의조차 고작 죽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란 유아적 발상이라니! 슈퍼맨과 배트맨은 영웅이지만 완전히 다른 성격과 행동 양식을 지녔다. 슈퍼맨은 신적인 존재이지만 의외로 국지적이다. 지구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는 단 한 명의 위험에 처한 시민도 구해 내는 섬세한 마음을 지녔는데 그래서 그는 특히 자신의 주변 사람에 대해 각별하다.

그에게 유일한 가족인 지구 어머니 마사는 정신적 지주이고, 연인 로이스는 그냥 그가 지구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 자체이다. 렉스가 그를 유인하기 위해 갑자기 건물 옥상에서 로이스를 밀치자 어느새 날아와 그녀를 구해주는 식이다.

게다가 그는 렉스가 마사를 납치하자 렉스를 죽일 수 있는 순간에 렉스에게 무릎을 꿇고 배트맨을 죽이라는 명령을 수행하러 날아간다. 이쯤 되면 신이 아니라 '민폐'이다. 배트맨은 어떠한가? 낮엔 돈을 긁어모으는 사업가로 자본주의의 선두에 서서 달리고, 초저녁엔 파티를 열곤 여자들과 놀아나지만 밤이 깊어지면 비로소 박쥐 가면을 쓰고 뒷골목을 배회하며 악당을 때려눕힌다.

심지어 그는 수감된 범죄자를 일일이 찾아가 박쥐 낙인까지 찍는 등 집착과 아집과 분노 속에서 사는 외통수의 고집쟁이이다. 정의 사회 구현이 아니라 스트레스 해소나 취미 수준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침대 위 그의 옆에 뜬금없는 여자 한 명이 있었다. ‘원 나잇 스탠드’ 상대이다.

상황이 이러니 그들이 서로에 대해 가진 반감의 설득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토록 지구인에게 친절하고 정의감에 넘치는 그들은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표면화하기 전에 최소한 대화라도 해 보려는 노력조차도 기울이지 않는다.

데드풀이야 원래 비뚤어지고, 이기적이며, 정의감 따윈 일찌감치 맥도널드랑 바꿔 먹은 얼치기니까 그렇다 치고, 슈퍼맨은 사람들이 신격화해 시내 한 가운데에 대형 동상까지 세워 놓고 우러러보는 인물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고담 최고의 갑부 배트맨은 이제 은퇴할 나이가 됐으면 그냥 조용히 살면서 자선사업이나 하는 게 더 영웅다운 게 아닐까?

제시의 연기력은 마치 ‘다크 나이트’의 스케어 크로우 역의 킬리언 머피를 연상케 할 만큼 소름 끼치는 수준이긴 하지만 ‘슈퍼맨’의 이전 시리즈에서 봤던 진 핵크먼이나 케빈 스페이시가 워낙 강렬했던 탓에 현저하게 비교가 돼 도저히 렉스라는 생각이 안 드는 게 극복할 수 없는 핸디캡이다.

더구나 그의 ‘진정 선하다면 강할 수 없고, 강하다면 선할 수 없다.’라는 논리는 굉장히 억지스럽다. 마치 이 영화의 근간이 되는 브루스의 ‘힘을 가진 자는 타락한다.’라는 명제를 부연 설명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 영화가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기본 요소는 흥미와 몰입이다.

베

그래야 공감과 이해를 동반함으로써 재미를 느끼거나 메시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배트맨 대 슈퍼맨’은 흥미와 몰입 면에서 뛰어나지만 공감과 이해가 쉽게 뒤따르지 않는다. 스나이더의 철학은 ‘왓치맨’에서 절정을 이룬 뒤 연기처럼 사라졌다.

마치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이 호러의 걸작 ‘엑소시스트’ 이후 졸작만 내놓은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은 배트맨 벤 애플렉은 크리스천 베일과 다른 개연성을 보유하고 있으며, 헨리 카빌은 역대 슈퍼맨 중 크리스토퍼 리브와 더불어 가장 슈퍼맨다운 매력을 뿜어낸다.

짧은 노출이지만 강한 임팩트를 준 원더우먼 역의 갤 가돗은 지금까지 슈퍼 히어로 무비의 조력자에 불과했던 슈퍼 히로인의 전성기를 예고하는 전투 능력과 매력을 지녀서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