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무비&철학] 서울발 미국 뉴욕행 비행기가 엔진 고장으로 부산 김해공항으로 회항하고 승객들은 레이오버 호텔에 하루 투숙하게 된다. 비행기 안에서부터 줄곧 유학생 수정(정수지)를 지켜보던 배낭여행객 선우(이한주)는 빨래방에서 그녀에게 말을 건다. 비흡연자인 선우는 수정에게 어필하기 위해 담배를 피워 보지만 재채기만 할 뿐이다.

그는 "와인 한잔하자."라고 제안하고, 수정은 "위스키를 마시자."라고 한다. 술집이 문 닫을 시각이 되자 선우는 제 방에 위스키가 있다며 한잔 더 하자고 제안해 성공한다. 수정이 먼저 적극적으로 몸을 던진다. 선우가 한국에 온 이유를 묻자 수정은 "아빠 장례식 때문이다."라고 답한다. 선우의 노래에 수정은 주르륵 눈물을 흘린다.

결혼을 앞둔 규형(강길우)과 지원(김시은)은 뉴욕의 규형 부모와 영상 통화를 한다. 지원은 비로소 규형이 미국 대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인터뷰 약속을 잡았음을 알게 되고 그에게 따진다. 미국에서 살 생각을 자신과 상의도 없이 했다는 데 기분 상한 것이다. 미국에 갈 경우 한국에서 쌓은 그녀의 경력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노년의 은실(변중희)은 암 수술을 받기 위해 딸 유진(강진아)과 함께 아들 부부가 있는 뉴욕에 가려 한다. 은실은 밤바다가 보고 싶다며 유진과 함께 해운대로 간다. 은실은 수술도, 전신 마취도 두렵다고 걱정한다. 유진은 오빠가 보고 싶어서, 오빠와 함께 살려고 미국에 가는 게 아니냐고 힐난하더니 자신도 전신 마취로 수술받았다고 외친다.

독립영화 '여섯 개의 밤'(최창환 감독)은 독일의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모든 여행은 여행자가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다.’라는 명제를 앞세운다. 부버는 '나와 너'와 '만남'의 개념을 도입한 종교적 실존주의자이다. 이 작품은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인생이라는 여정에서의 '관계'를 통한 실존주의를 웅변한다.

수정이 "왜 그렇게 나를 쳐다봤냐?"라고 묻자 선우는 "슬퍼 보여서."라고 답한다. 그녀는 어릴 때 이미 아버지와의 관계가 단절됐다. 유학을 떠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친구로부터 자신을 떠나 보내며 아버지가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한 번 안아 주고 싶었는데 이미 눈을 감았다.

이 두 사람의 에피소드는 가족이라는 주제 중 부녀 관계라는 소재에서 다소 벗어나 허공을 맴도는 듯하다. 선우는 소심하고 소극적이며 내성적이다. 그렇다고 원나이트 스탠드를 주도한 수정이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잃었다는 슬픔보다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 줬다는 자책감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선우와의 잠깐의 관계에서 위로받으려는 것뿐이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부부 간의 소통 문제를 말한다. 부부란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던 남남이 가족이 되어 가정을 꾸미는 것이기에 많은 이해, 양보, 희생, 소통 등이 필수적이다. 그게 싫다면 그냥 연애만 하든가, 아니면 아예 그것조차 멀리하고 독야청청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특히 '꼰대'들이-아직도 결혼은 필수라고, '무조건'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결혼하려면 유물론적으로도 사전 준비와 구비과 필요하겠지만 관념론적으로도 전술한 정신 자세를 가다듬으며 스스로 약속해야 한다. 그게 없다면 결혼 생활은 불행할 것이고 결국 결말은 비극이 되고 말 것이다.

연애 중인 사람, 결혼 준비 중인 사람. 과연 해피엔드를 만들 것인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인가? 마지막 에피소드는 남성우월주의를 비장하게 비판한다. 은실은 어릴 때부터 아들과 딸을 차별했다. 변변하게 벌어 놓은 돈도 없으면서 아들 집은 사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암에 걸렸는데 아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유진이 지금까지 은실을 챙겨 줬다. 그런데 은실은 수술을 핑계로 아들을 보러 간다. 대놓고 "예쁜 내 아들, 살아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미국에 가려 한다."라고 말한다. 그런 은실은 유진이 자궁경부암 수술을 받은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더 늦기 전에 시집가라."라며 잔소리만 늘어놓을 따름이었다.

사르트르는 야스퍼스와 마르셀로 대표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하이데거와 자신으로 대표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나누었다. 굳이 구분하자면 이 작품은 후자이다. 아예 유물론적 실존주의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모든 실존주의의 공통 명제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이다. 신의 유무를 떠나 스스로 본래적 자기를 만드는 것이다.

계속해서. 만약 본질 혹은 신이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욱 그래야 할 터. 그게 바로 자기 존재의 선택과 비약과 발전이다. 규형이 미국에 인터뷰를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지원이 짐을 싸 떠나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유진이 '남자보다 친구가 더 낫다.'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그런 주체적 실존주의 덕이다.

다음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수정은 선우를 본체만체한 채 혼자 밥을 먹는다. 유진은 여전히 은실을 챙겨 준다. 규형은 밤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홀로 비행기에 탑승한다. 모두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저마다 있기 때문이다. 첫째 에피소드가 조금 답답하지만 둘째, 셋째가 모두 훌륭해 롱테이크마저 지루하지 않다. 2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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