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픽사베이.
이하 픽사베이.

[김경아의 ‘특별한 당신’] 멀찍이 친정집이 보이나 싶더니 집 앞을 서성이는 검은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가는 중이라는 전화를 한 지도 한참 인데 언제부터 나와 계신 걸까. 해 떨어진 저녁녘, 여전히 쌀쌀한 날씨에 새빨개졌을 아버지의 빨간 코끝이 내 코끝을 시리게 한다.

'이리로 오라.'라고 휘휘 저어 손짓하는 아버지 덕에 좋은 자리에 쉽게 차를 댔다. 어느 해부턴가 봉숭아 물 들이던 넓은 마당의 영진이네도, 구슬치기하고 고무줄놀이했던 기홍이네도, 하나 둘 집을 허물더니 반듯반듯한 원룸들이 들어서 골목마다 주차하기가 여간 어려워진 게 아니다.

혹시라도 먼 길 달려온 딸이 주차에 애먹을까 싶어 미리 나와 꽃샘추위와 마주하고 계셨을 아버지의 속 깊은 배려가 감사하고 죄송하여 또 한 번 코끝이 시려 온다. 내 인생의 폭풍우도 이런 모습이었을 테지. 바람에 나부끼랴, 폭우에 젖으랴 나보다 먼저 내 앞에서 폭풍우를 맞이하고, 우비를 입히고, 우산을 씌워 인생길에 내보내셨을 테지,

혼자 가는 인생길, 홀로 가지 않게 멀리서 뒤에서 바라보고 기도하며 살피고 또 살펴 주셨을 테지. 알게 모르게 응원하고 지원해 준 아버지의 사랑이 고마워 시린 코끝을 훌쩍인다. "하비!” 차창 밖으로 할아버지를 본 딸 아이가 발 동동 구르며 내려 달라고 아우성이다.

“아이고, 우리 지아 왔어요! 지아, 하비 보고 시포쏘요?” 서른다섯 해가 지나도록 들어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콧소리. 나긋나긋한 애교 섞인 그 소리가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숨죽여 웃고 있자니 그 옛날 흑백의 옛 시절로 돌아간다. 어릴 때 노란색을 좋아하면 아빠를 좋아하는 거라는 근거 모를 이야기 마냥 어린 시절 나는 노란색을 그리도 좋아했다.

노란 개나리도 좋았고, 노란 색연필도 좋았다. “얘는 항상 아빠 편이야.” 놀려 대듯 서운해하던 엄마의 푸념처럼 아빠가 하는 거 그대로 따라하고, 아빠가 먹는 거 똑같이 먹고 싶어 했던 나는 요샛말로 ‘아빠 바보’였던 셈이다.

늦은 밤 야식 봉지를 들고 오던 아빠의 그 맛있는 냄새가 좋았고, 가끔 집 앞 포장마차로 불러 우동이며 꽁치 구이를 시키고 한잔 술을 기울이는 아빠의 그 시큼한 술 냄새가 좋았다. 유난히 영화 보기를 좋아했던 아빠와 나, 그리고 곱슬머리 남동생.

우리들은 늦게까지 안 잔다 잔소리하는 엄마 몰래 비디오 가게를 가곤 했는데 잠옷 바지 속에 비디오테이프를 숨겨 조심조심 걸어 들어오다 통 넓은 바지 사이로 쏙 빠져 나가 배꼽 잡았던 어느 날이 무척이나 그립다. "어서 들어와. 밥 먹자.”

아빠 사랑을 되뇌며 현관에 들어서니 맛 좋고 냄새 좋은 ‘엄마 밥’이 한상 가득이다. 조물조물 무치고 볶고 끓이고 부치고, 먹성 좋은 사위가 한 입에 쏙 넣을 전부터 후후 불어 떠먹을 얼큰한 갈비 찌개까지. 분주히 장만한 엄마 손맛 먹거리들에 젓가락이 들썩거린다.

버팀이 될 만한 것이면 무조건 잡고 서는 통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8개월 둘째 아이 때문에 부스터 없는 외식은 꿈도 못 꾸는 요즘. 천천히 밥 먹으라며 손주를 번쩍 안아 올리는 엄마 덕에 오랜만에 뜨끈한 밥다운 밥을 먹었다.

식은 국에 밥 말아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손주 이유식까지 금세 만들어 내시더니 좀 전에 먹은 젖병을 닦고 소독할 물을 끓이신다. 아, 먹고 또 먹고. 누워서 상큼한 오렌지를 까먹으며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는 여유를 부려본 때가 언제인가.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