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한때 충무로의 대표 흥행사였던 강우석의-현 시점까지-마지막 연출작이다. 그의 강점이자 핸디캡인 '고색창연'한 색깔이 두드러진다. 고산자(호)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라는, 당시로선 엄청난 지도로 한반도를 제대로 그려 낸 위대한 지리학자이다.

‘고산자’는 정확한 생몰년은 물론 주거지 등 자세한 생애가 전혀 기록되지 않은 김정호의 지리학자로서의 값어치에 포커스를 맞추고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상을 통해 순수한 장인 정신과 휴머니즘 그리고 절절한 부성애를 그리려 애쓴다.

영화는 지도 제작을 위해 동원된 기리고차(반자동 거리 측정 장치)를 뒤따르는 흥선(유준상)과 어린 고종의 행차로 시작된다. 여기서 웬 이방인 한 명이 적발되는데 그는 평민 출신으로 오로지 정확한 지도 제작에 눈이 먼 김정호(차승원)이다.

이렇게 정호와 흥선의 인연 혹은 악연은 시작된다. 이후 10여 분간 영화는 정호의 단독 신으로 대사 없이 이어진다. 화면은 백두산부터 마라도, 독도까지 전국의 절경들을 담아 낸다. 한류 열풍에 부응하는 한반도 홍보 필름으로서 손색이 없다.

그렇게 전국 팔도를 누빈 끝에 3년 반 만에 정호는 한양 외곽의 집으로 되돌아온다. 그의 가족이라곤 이제 시집갈 때가 된 외동딸 순실(남지현)이 유일하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며 순실을 친딸처럼 지켜 주는 여주댁(신동미)과 그의 지도를 목판으로 옮겨 주는 조각장이 바우(김인권)가 가장 친한 친구이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흥선과 안동 김 씨의 정치적 대결, 정호와 그 주변을 둘러싼 소소한 코미디적 에피소드의 두 장으로 나뉘며 서로 신경계를 연결시킨다. 오랫동안 세도 정치를 해 온 안동 김 씨 일가의 정치력의 근원지는 비변사이다.

하지만 고종을 옹립한 뒤 수렴청정으로 대권을 틀어쥔 흥선은 의정부를 부활하고 비변사를 폐지시킴으로써 안동 김 씨를 압박해 씨를 말리려고 한다. 그러나 김 씨 세력 역시 호락호락 패배하지 않고, 어떡하든 부활하고자 갖은 수를 내놓는다.

그런 양대 세력이 공통적으로 헤게모니를 틀어쥘 결정적인 무기로 주목하는 게 바로 정호의 목판본 대동여지도이다. 하지만 정호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이것을 내줄 리 없다. 흥선은 거대한 포상금을 미끼로 유혹하고, 김 씨 측은 정호에게 절도죄와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강제로 빼앗으려 하지만 정호는 모든 것을 잃어도 그것만은 지키고자 고군분투한다.

기획 의도와 시도 자체는 훌륭하다. 그 노고는 치하받아야 마땅하다. 지금껏 모든 사극은 왕조나 영웅을 중심으로 신화나 설화까지 포용함으로써 철저하게 상업적 논리를 추구한 데 반해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하지만 군림에만 치중했던 다수의 왕보다 훨씬 뛰어난 과학적, 역사적 유물을 남긴 김정호란 인물을 재조명하려 한 출발은 칭송받고 귀감이 돼야 한다.

하지만 내용이 무척 산만하다. 영화의 축은 김정호의 신념이다. 다 자란 딸을 몰라볼 정도로 가정에 무심한 채 전국을 두 발로 직접 밟으며 정확한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쏟은 노력,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도 그렇게 완성한 목판본은 권력자의 손에 넘길 수 없다는 외고집이다.

그 배경은 35년 전 홍경래의 난 때 잘못된 지도 때문에 깊은 산속에서 고립돼 얼어 죽은 아버지 때문이다. 당시 홍경래 진압에 동원된 아버지 일행이 먼 길을 떠날 때 길잡이로 삼은 것은 군에서 내준 군현도 한 장이었다.

그러나 이 지도는 실측에 근거하지 않은, 터무니없는 내용이었기에 일행이 산맥 속에서 길을 잃고 사망한 것이었다. 그래서 정호는 보부상부터 일반인까지 안전하고 빠르게 여행을 다닐 수 있게끔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 무상으로 보급해 주고자 한 것이다.

정호와 순실, 정호와 여주댁, 그리고 순실과 바우의 아기자기한 일상생활은 이젠 드라마도 잘 취급하지 않는, 소박한 시골 풍경화에 다름없다. 게다가 정호의 캐릭터는 어쩐지 많이 봐 온 기시감을 주고 대사는 ‘개그콘서트’를 보는 듯하다.

정호가 밥을 짓는 여주댁과 순실에게 슬며시 다가가 “앞으로 내가 삼시세끼 다 해주겠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바우가 정호와 대화를 나누던 중 ‘말에 내비게이션을 달고, 그 어나운싱은 순실에게 맡기겠다.’는 내용의 농을 건네는 상황 등은 왠지 명쾌한 웃음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런 에피소드가 잔잔한 재미라면 영화가 큰 울림을 주고자 의도하는 장치는 정치권의 다툼과 그에 희생되면서도 끝끝내 민중 해방과 민권 회복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정호의 충돌이다. ‘삼시세끼’의 캐릭터를 그려 내던 차승원이 갑자기 진지해지고 비장해질 땐 이 코미디와 드라마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줄 아는 베테랑 배우의 탁월한 연기력은 분명히 빛을 발한다.

하지만 흥선과 김 씨의 집착과 분노에선 시대적 아픔을 찾아 내는 게 쉽지 않다. 그건 연기력 탓이 아니라 시나리오의 완성도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살아 있는 역사를 배경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에 충실하지 못한 불성실 혹은 무심함이 못내 아쉽다.

김정호의 생몰년은 정확하진 않지만 1804년(순조 4)과 1866년(고종 3)으로 추정된다. 영화의 ‘현재’인 홍경래의 난(1811) 이후 35년, 혹은 또 그로부터 3년반 후라면 1846년 혹은 1849년이다. 철종의 재위 기간이 1849~1863년이니 영화 속 배경은 헌종 혹은 철종 재위 때가 된다.

안동 김 씨의 득세 시절은 맞지만 아직 흥선은 대원군이 아닌,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거나 김 씨 가문에 구걸을 하던 파락호 시절이었다. 그래도 차승원과 김인권의 조화는 꽤 볼 만하다.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김인권의 연기는 꽤 감동을 준다. 바우는 정호에게 왜 지도를 그리냐고 묻는다.

정호의 대답은 “가슴이 뛰니까.”이다. 그렇게 관객의 가슴을 뛰게 하는 대사도 있다. “길 위에서는 신분도, 귀천도 없다. 오직 길을 걷는 자만 있을 뿐이다.”라는 정호의 대사가 주제이다. 그 길은 세상이고 길을 걷는 자는 행동하는 자이다다. 천주교도가 참수당하고, 어린 소녀가 고문 끝에 죽는 영화 속 아수라는 과거가 아니다. 올바른 생각은 행동으로 옮겨질 때 빛을 발한다. 이 영화가 그나마 볼 만한 이유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