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2020년 말 환갑을 며칠 앞두고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김기덕 감독이 이전에 주로 인간 내면의 욕망과 갈등, 그리고 겉과 속이 다른 2차원의 세계를 그렸다면 ‘그물’(2016)에서는 당당하게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3차원적 질문을 던진다.

37살의 북측 어부 철우(류승범)는 남북의 경계선에서 생선을 잡아 생계를 잇는 가장이다. 아름다운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그는 이른 아침 밥상을 차린 아내가 사랑스러워 충동적으로 부부 관계를 맺을 만큼 하루하루가 행복한 남자이다.

그런데 그물이 엔진에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표류해 남측으로 흘러간다. 남측 정부 기관은 그를 ‘잠재적 간첩’으로 분류하고 날카로운 취조에 들어간다. 그를 담당하는 요원은 조사관(김영민)과 보호자 오진우(이원근)이다. 진우는 처음부터 철우가 간첩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간파한다.

하지만 한국 전쟁 때 부모를 잃은 조사관은 애국심이 아닌 복수심 때문에 ‘빨갱이’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 철우에게 간첩 혐의를 씌우려 안간힘을 쓴다. 철우가 이적 의도가 있건 없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하든 그를 간첩으로 몰아세우는 게 애초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철우와 조사관의 힘든 싸움은 결국 무혐의로 가닥을 잡아 가고 책임자인 부장 역시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부장은 그를 송환하기보다는 귀화시키기 위해 명동 한복판에 방치시킴으로써 풍요로운 남측의 생활상을 보여 주려는 작전을 펼친다.

철우의 서울 방황 해프닝은 언론에 노출된다. 그러자 북측은 철우의 생환을 남측에 강력하게 요청한다. 우여곡절 끝에 북으로 돌아간 철우를 북의 정권은 선전, 선동에 이용한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 드러난 쇼일 뿐 보위부는 남측의 정보 기관과 똑같이 그의 사상을 의심하고 겁박하며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최근 영화의 메시지가 강하다 싶으면 사람들은 이념 논쟁을 벌일 좋은 소재로 삼고 핏줄을 곤두세우기 십상이었다. ‘변호인’, ‘국제시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가 딱 좋은 먹잇감이다. 절반 이상을 남측 조사관의 어긋난 복수심에서 비롯된 편견과 광기 어린 집착에 집중한다.

철우를 간첩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동료들과 상관에 의해 꺾이자 조사관이 갑자기 광기에 가득 차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부르는 장면이 가장 압권이다.​ 북측 조사관이 철우가 항문에 숨겨온 달러를 취하며 이를 발설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두겠다고 회유하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철우는 남측 조사관의 압박에 “사상 그딴 거보다 내 가족이 더 중요하다.”라고 외친다. 이 영화의 주제이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열강들의 야욕과 이념에 희생돼 두 동강이 난 채 아직도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 논쟁에 휘둘려야 하는 남과 북 모두의 ‘백성’들에게 사실 중요한 것은 집권도 이념도 아닌, 내 가족과 나의 생존일 뿐이다.

조선 시대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욱 그런, 평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냥 ‘등 따습고 배부른 것.’이다. 철우가 북에서 조업을 나갈 때 군인이 묻는다. “만약 엔진이 고장 나 배가 남측으로 표류할 경우 배를 버리겠느냐?”라고. 그에 대한 철우의 대답은 “배가 내 전 재산인데.”이다.

그는 남측에서 조사 받는 내내 “북으로 보내 달라.”라고 울부짖었다. 그가 배를 버리고 헤엄쳐 북측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측으로 흘러들어온 것은 배, 즉 가족을 먹여 살릴 배 때문이었다. 배는 곧 생존이다.

철우를 어떻게든 간첩으로 조작하고자 했던 남측 조사관이나, 철우에게서 남측에 협조한 정황을 만들고자 했지만 결국 달러 지폐 몇 장에 영웅으로 만들어 준 북측 조사관이나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들 역시 오늘날의 유일한 분단국으로 만든 원인 제공자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의 망령에 희생된 남측과 북측의 ‘백성’들의 왜곡되고 길들여진 자화상이다.

드물게 류승범의 연기가 진지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분노와 절망과 간절함을 훌륭하게 넘나든다. 어색한 북측 사투리쯤은 애교로 봐줄 만하다. 다만 메시지가 주는 진중한 울림에 비해 대사나 비주얼이 다소 약한 게 아쉽다. 김기덕의 작품 중 이례적으로 15세 관람 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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