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김자현.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김자현.

[미디어파인=김자현의 배낭을 메고] 심장이 빨리 뛰는 느낌이었다. 홀린 듯 빨리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건물 옥상으로 무작정 올라갔다. 그리고 마주한, 도시의 끝에 맞닿은 설산. 설렜다. 나는 더워서 반팔을 입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저 산은 얼마나 다른 세상인지 녹지 않는 눈이 쌓여 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세상이 보이는 신비. 네팔 포카라에서 본 안나푸르나의 첫인상이었다. 8월에 인도에서 한국인 여행자들을 몇 명 만났는데 우연히도 그때마다 인도를 지나 네팔로 간다는 사람들이었다. 9월까지의 우기가 지나면 10월부터는 곧 히말라야 트레킹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리고 맞이한 10월. 얘기를 들을 땐 별 관심이 없었는데 막상 10월이 되니 마음이 동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언제 갈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도 마음을 거들었다. 마침 학사 일정에 여유가 생겼다. 충동적으로 네팔로 넘어가는 국제 버스를 예약했다. 델리(Delhi)에서 꼬박 32시간 버스를 타고 가니 네팔(Nepal), 포카라(Pokhara)였다.

내가 선택한 트레킹 코스는 해발 1050m의 나야풀(Nayapul)에서 출발해 해발 4130m의 ABC(Annapurna Base Camp)까지 가는 6박 7일 코스였다. 준비 차 먼저 트레커들이 많이 찾는다는 한국 식당에 갔다. 다녀온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니 대부분 짐을 들어 주는 포터(Porter)나 길을 알려 주는 가이드를 고용하라고 했다. 안전상의 이유였다.

데우랄리 공동 숙소=김자현.
데우랄리 공동 숙소=김자현.

산 속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르고, 또 고산병이 올 수도 있다 하니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하루에 25달러 정도를 지불해야 한다는 게 내겐 부담이었다. 고심 끝에(사실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결국 포터와 가이드 없이 트레킹을 가기로 결정했다.

대신 동행을 구해 보려고 했다. 성수기라 하니 일정이 맞는 한국 사람 한 명 쯤은 포카라에 있겠지 싶었다. 그런데 없었다. 의도치 않게 혼자 트레킹을 시작했다. 혼자 맞이하는 시작은 떨렸다. 그러나 막상 걸음을 떼니 어떻게든 헤쳐 나갈 길이 보였다.

길을 모를 때는 그 자리에서 잠시 쉬었다. 그러면 으레 길을 물어 볼 사람이 나타났다. 걱정했던 고산병은 다행히 내겐 오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여서 트레킹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더디게 걷고 싶을 때 더디게 걷고 빠르게 걷고 싶을 때 빠르게 걸었다.

다리가 아프면 그 자리에 앉아 쉬었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었다. 일정이 늦어져도, 혹은 일정을 마음대로 바꿔도 미안할 일이 없었다. 누군가와 발 맞추어 걸을 필요 없는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만끽’이었다. 산속에서는 새벽이 늘 맑았고 점심이 가까워질 때쯤 다시 구름이 꼈다.

김자현.
김자현.

트레킹 첫날 간드룩(Ghandruk)에 숙소를 잡고 나니 구름이 짙었다. 저녁엔 비가 조금씩 내렸고, 산 저편에선 천둥, 번개가 쳤다. 이튿날 새벽 5시 날씨가 어떨지 몰라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간밤에 무슨 일이 다시 있었는지 새파랗게 맑은 하늘이 눈앞에 펼쳐진다.

왼쪽엔 안나푸르나, 오른쪽으로는 마차푸차레(Machapuchare)의 모습이 우뚝하다. 이날 아침에 본 풍경을 잊을 수가 없어서 트레킹하는 동안은 아침에 늘 일찍 눈을 떴다. 잠자고 싶은 마음보다 매일 아침 맑은 하늘 가운데 드러나는 설산을 마주하는 설렘이 더 컸다.

 

트레킹 중에 많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만났다. 둘째 날엔 그중 마(魔)의 구간이라는 콤롱(Komrong)에서 촘롱(Chomrong) 사이를 지나야 했다. 가이드 북에 따르면 오르막을 오르기 전 내리막이 나오고, 그 후 만나는 오르막에서 1시간 30분 정도 심장이 터지기 직전까지 혹사시킨다고 한다.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는데 정작 힘들었던 곳은 오르막 전에 지나야 했던 긴 내리막이었다. 힘들다는 것이 육체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오르막에서 땀이 더 많이 났고, 허벅지가 아팠고, 숨을 더 헐떡였지만 내리막에서는 이상하게 지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기분 탓이었다. 가파름과 관계없이 내리막이라는 단어는 자꾸만 수월함을 기대하게 했다. 기대가 깨진 자리에 실망은 더 아픈 법이어서 그 내리막이 유독 힘들게 느껴졌던 것이다. 고도가 올라감에 따라 출발지가 제각각 달랐던 사람들은 한곳으로 점점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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