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현.
김자현.

[미디어파인=김자현의 배낭을 메고] 반면 물품 조달이 어려운 탓에 숙소(Lodge)는 점차 줄어들었다. 3일 차 해발 3200m의 데우랄리(Deurali)부터는 방이 충분치 않았다. 개인실은 대부분 가이드를 통해 예약한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었다. 예약을 했을 리 없는 나는 도미토리(Dormitory, 공동 숙소)에 묵었다.

개인실이나 도미토리나 특별한 난방 장치는 없었다. 건물은 오로지 바람을 막아 주는 용도였다. 저녁엔 두텁고 무거운 이불 한 채를 줬다. 가져간 침낭 속에 먼저 들어간 후 무거운 이불을 덮으면 그런대로 아늑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숙소가 식당을 겸해서 끼니를 해결했다.

산 아래에 비해 물가가 4~5배 정도 비쌌지만 이 산속에 재워 주고 먹여 주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계절은 산 아래에서는 시간의 흐름이었지만 산 속에서는 높이의 차이이기도 했다. 산 아래는 여름이었는데 해발 3000m에 이르니 가을이었고, ABC는 이른 겨울이었다.

데우랄리부터는 오르막을 올라도 땀이 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기모 바지와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다. 해가 비치는 낮은 다시 조금 따뜻했지만 해는 일찍 졌다. 완전히 구름 속에 둘러싸인 ABC의 저녁은 가지고 간 모든 옷을 겹쳐 입어도 추웠다.

이하 픽사베이.
이하 픽사베이.

내복부터 바람막이까지 5벌을 겹쳐 입고도 패딩 점퍼를 가져오지 않은 게 아쉬웠다. 짧은 시간에 크게 변한 내 옷차림을 보며, 계절이 바뀌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ABC에 도착한 날은 구름이 짙어 주변을 볼 수 없었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새벽 4시에 눈떴다.

새벽과 아침에만 맑은 날씨를 원 없이 만끽하자는 생각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었을 때 차가운 바람이 뭉텅, 얼굴을 감쌌다. 그럼에도 나는 잠이 덜 깬 것마냥 기분이 몽롱했는데 그건 앞에 펼쳐진, 믿기 힘든 풍경 때문이었다.

구름의 막연함이 갠 새벽, 안나푸르나는 상상보다도 훨씬 눈앞 가까이에 거인처럼 서 있었다. 이날 불빛 없이도 산을 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마침 달이 산 너머로 넘어간 시각이었다. 덕분에 별은 어둠속에서 촘촘히 빛났고, 만 년 동안 녹지 않았다는 눈은 그 별빛을 다시 반사해 흰 봉우리를 드러냈다.

우주를 상상했다. 나는 점처럼 작았고 나를 둘러싼 산과 발밑으로 깎아지른 협곡은 끝이 없었다. 추위는 뒷일이었다. 동이 트고도 한참을 그 풍경과 마주했다. 굳이 말하자면 감탄하는 것이 일이고 목적인 시간이었다. 어둠 속이면 어둠 속에서, 해 뜰 녘이면 해 뜰 녘대로, 해 뜨고 나서는 해 뜨고 난 모습 그대로가 경외로운.

사진을 많이 찍으려고 카메라 배터리를 아끼고 아껴 가며 올라왔는데 정작 ABC에서는 사진을 몇 장 찍다가 말았다. 아무리 찍어 보려고 해도 내가 마주하고 있는 모습은 카메라로 온전히 다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해가 다 뜬 늦은 아침에 생강차 한 잔을 마시고 배낭을 멨다.

한참을 봤어도 안나푸르나를 뒤로하고 내려간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조금 내려가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ABC에서 1시간을 더 있다가 걸음을 뗐다. 오래 봤어도 내려가는 동안 몇 번을 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MBC(Machapuchare Base Camp)까지 이어지는 그 완만한 길을 오래 걸었다.

내려가는 일정이 2시간이나 지체되어서 오후에 애를 먹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트레킹은 탈 없이 끝났고, 내려와서 다시 위를 생각한다. 산 위에서 날이 너무 추워져 도저히 씻을 엄두가 나지 않는 때 내가 여기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고생을 사서 할 생각은 전혀 아니었고, 멋진 풍경 사진을 얻고자 했다면 온라인 검색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얼마 전 본 기사에서 기업 인사 담당자가 말하는 불필요한 스펙으로 극기를 뽑았다니 스펙도 못 될 것이다. 그러니 굳이 말하자면 마음이 동해서 발길이 따라왔고, 다행히 그럴 수 있는 때였다.

정직한 시간이었다. 경험한 것들을 마냥 좋았다고 포장하지 않겠다. 힘든 것은 그냥 힘든 것이었고, 아름다운 것은 그냥 아름다운 것이어서 굳이 재포장할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대신 시간에도 무게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거운 시간이 잘 잊히지 않을 시간이라 한다면 10월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를 오가는 길 위에서 나는 무거운 시간을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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