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많은 돈을 들인 만큼 벌어들이겠다는 재난 블록버스터에 깔린 계산은 인간 본연에 내재된 삼라만상에 대한 공포심과 절체절명 앞에 무기력한 상황에서의 신의 가호 혹은 불세출의 영웅의 초인적 활약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가능하다. 영화 ‘판도라’(박정우 감독)는 그런 할리우드식 계산법의 연장선상에 있다.

기승전결은 매뉴얼을 따르고 솔루션과 그에 따른 교훈과 메시지도 당연히 틀에 박혀 있다. 유치한 코미디도 재기 발랄한 유머도 없지만 뭔가 다르다. 원전 폭발 사고라는 소재를 뻔히 알면서도 볼수록 빠져 든다. 엄청난 블랙코미디로 웃음을 통한 환멸과 냉소를 던지게끔 만든다. 꼭 봐야할 이유 중 하나이다.

모든 악이 창궐하는, 그래서 인류 멸망이 예고된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판도라의 상자에서 뛰쳐나온 희망을 그린다. 박 감독이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특사’ 등 코미디 시나리오로 필모그래피를 쌓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별 원자력 발전소가 설치된 한반도 동남권의 어촌 월촌리.

이미 어로와 농사가 불가능하고 관광객도 끊긴 지 오래. 재혁(김남길)은 원전 노동자인 아버지와 형을 방사능 피폭으로 잃은 뒤 받은 보상금으로 사업을 했지만 다 말아먹고는 따로 뾰족한 수가 없어 원전에서 일하고 있다. 하루빨리 결혼하고픈 연인 연주(김주현)와 달리 그는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 큰돈을 벌고자 아등바등한다.

연주와 어머니 석 여사(김영애)는 물론 남편과 사별한 뒤에도 변함없이 한집에서 시어머니와 시동생을 챙겨주는 형수 정혜(문정희)와 민재를 호강시켜 주기 위해서이다. 발전소장 평섭(정진영)은 한별 1호기가 심각하게 노후했음을 윗선에 보고하지만 씨도 안 먹히자 청와대 부속실을 통해 대통령(김명민)에게 알린다.

그러나 젊은 대통령을 우습게 알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국무총리(이경영)의 농간 탓에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지나치게 된다. 월촌리의 쥐와 새들이 전부 떠나고 규모 6.2의 지진이 발생한다. 그 여파로 규모 7에도 끄떡없다던 한별의 큰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맥없이 한별 1호기가 폭발함으로써 주민들은 아비규환에 파묻힌다.

대통령이 행정부의 책임자들을 불러 모아 대책 회의를 벌이지만 총리는 국정 혼란을 이유로 최고 경고 발령에 반대한 채 자꾸 국민과 언론의 눈과 귀를 가리려는 쪽으로 유도한다. 그러는 사이 평섭의 진두 지휘 아래 상황이 정리되는 듯하지만 사고 지점에 저장된 400톤의 폐연료봉이 폭발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대한민국은 죽음의 땅이 된다. 미국과 일본 정부는 한국에 체류 중인 자국민들에게 소환령을 발령한다. 대통령은 올곧은 신념과 청렴한 도덕성을 지녔지만 결정적으로 무능하고 우유부단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죄송하다.”라는 사과 뿐.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를 최종 담화 때 고작 한다는 말이 “죄송하다. 부탁한다.”이다.

총리는 자신의 자리 보존에만 급급한, 권위적 아집이 강한 권력형 관리이다. 대통령이 실제 상황을 국민에게 알려 한 명이라도 더 살리자고 제안할 때 “고작 94만 명을 살리고자 대한민국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려 하느냐?”는 아전인수식 궤변을 늘어놓는다. 자신이 국민의 심부름꾼이란 것을 망각한 채 국민 위에 군림하는 신 노릇을 하려는 것이다.

공무원의 최상위 조직이 그러니 말단 공무원은 말할 것도 없다. 집을 떠나 체육관으로 피란 온 월촌리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투입된 경찰들은 상황이 악화되자 체육관 문을 걸어 잠근 채 도망간다. 자기 보호 본능과 공무원의 본분 사이의 논란을 떠나 집단 학살이다. 한국 전쟁 당시 도망치며 한강 다리를 끊은 이승만을 연상케 한다.

상황이 악화될수록 자립적으로 성장한 대통령은 그동안 정부가 ‘꺼지지 않는 불’ 운운하며 전 국민의 원전에 대한 맹신을 세뇌한 게 사이비 종교와 다름없었음을 깨닫고는 “에너지원이 원전뿐이냐.”라고 일갈하며 방향타를 잡는다. 서 여사는 정부와 한별이 귀가 따갑도록 홍보한 데 대해 세뇌된 기성세대이다.

민재의 암울한 내일에 암담한 정혜는 “이게 다 어머니 탓.”이라고 원망하며 대립각을 세운다. 걸어서 피신하던 중 물밀 듯이 밀려오는 군중과 부닥친 정혜는 민재를 보호하고자 안간힘을 쓰지만 그만 손을 놓친다. 군중의 썰물이 지나간 뒤 울부짖으며 민재를 찾던 그녀는 시어머니가 죽음을 무릅쓰고 민재를 보호한 것을 발견한 뒤 용서를 빈다.

그럼에도 서 여사는 여전히 “내가 미안하다.”라고 말한다. 진작 젊은이들의 말을 듣고 원전의 위험성에 뜻을 같이했어야 했다는 자책감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역시 정반대의 의견으로 갈라져 있다. 어떤 이는 머리띠를 두르고 원전 가동 중지 시위를 벌이는데 어떤 이는 원전으로 출근하며 “그래도 먹고살게 해 줬는데.”라고 갈등한다.

사실 그건 좌냐 우냐의 이념적 방향이 아니라 현실 직시와 생존의 기본권 주장의 올바른 판단력 문제이다. 콘트롤 타워가 무너진 정부와 그로 인해 구석구석이 붕괴되고 부정부패가 만연된 사회 시스템의 나라를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정부와 언론의 여론 조작에 놀아난 기성세대의 자아비판이고, 무조건 그들을 ‘꼰대’ 취급하며 경시한 젊은 세대의 후회이다.

한별은 대한민국을 파괴할 위험성을 내포한 원전의 본부장 자리에 경험도 지식도 전무한 사람을 낙하산으로 앉히고, 한별 등과 결탁했을 정부가 동남 지역 골목 상권을 재벌에게 내주는 바람에 주민들은 원전 노동 외의 생존 수단을 잃었다. 처음엔 철부지 같던 재혁의 활약과 김남길의 존재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급상승한다.

재혁의 “이런 거지 개떡 같은 나라를 위해 우리가 왜 죽나? 그러나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거리에 내몰려 맨발로 피신하고 있는 우리 가족이 죽는다. 너무 억울하고 분하지 않은가?”라는 대사가 이 영화의 주제이다. 할리우드와 달리 겁도, 사연도 많은, 하잘것없는 노동자들이 히어로 역할을 해낸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철학, 진정성, 시사성 등의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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